깊이를 쌓는 시선과 무게를 덜어내는 시선이 만나 생면 파스타를 하나의 미식 경험으로 확장하고, '한국을 담은 이탈리안'을 향해 나아가는 '페리지(Perigee)'의 임홍근, 신가영 셰프가 전하는 이야기.
지난 몇 년간 서울의 다이닝 씬에서 ‘예약 전쟁’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가장 뜨겁고도 가파르게 성장한 장르는 단연 ‘생면 파스타’였다. 가공된 건면 중심의 단순한 문법을 넘어, 셰프가 매일 주방에서 직접 반죽하고 밀어낸 생면의 다채로운 텍스처와 완성도 높은 소스의 결합에 대중은 열광했다. 소위 ‘서울 3대 파스타 바’라는 수식어와 함께 수백 통의 예약 문의와 티켓팅 전쟁이 벌어지던 그 치열한 흐름의 최전선에 바로 ‘페리지(Perigee)’가 있었다. 단순히 반짝이는 유행을 넘어 업계 전반의 제면 수준을 끌어올리고, 손님들에게 생면 파스타를 하나의 밀도 높은 다이닝 경험으로 확장시킨 주역이다.
달이나 인공위성의 궤도에서 지구와 가장 가까워지는 지점을 뜻하는 ‘근지점(近地點)’, 페리지. 달의 형상을 품은 묵직한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낮은 조도 아래 차분하게 정돈된 테이블 공간 너머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주방의 풍경이 한눈에 펼쳐지며 중력에 이끌리듯 그 궤도에 사로잡힌다. 그 주방에는 습도와 온도를 집요하게 체크하며 반죽을 매만지는 셰프들의 묵직한 호흡이 흐른다. 화려한 기물이나 시각적인 장식에 기대기보다, 접시 위의 완성도와 제면 테크닉으로 스스로의 자리를 증명해 온 공간. 그 중심에는 임홍근, 신가영 셰프 부부가 있다.
두 사람은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의 치열한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 주방을 거치며 엄격한 규율과 정통 이탈리안 제면의 감각을 몸으로 체득했다. 단 하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격전지에서 다져온 탄탄한 기본기, 그리고 이탈리아 현지에서 마주한 클래식한 조리법에 대한 깊은 탐구는 두 사람의 요리를 지탱하는 단단한 뿌리가 되었다.
멈춤에서 시작된 변곡점, 그리고 페리지의 탄생
‘페리지(Perigee)’의 임홍근, 신가영 셰프
이탈리아에서 배움을 이어가던 중 마주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예기치 않게 귀국길에 올랐을 때, 국내 다이닝 시장은 전 세계적인 위기 속에서 신규 채용이 전면 중단될 만큼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해외에서 돌아온 수많은 실력파 요리사들이 설 자리를 찾지 못하던 막막한 시기, 두 사람은 지인의 작은 주방을 빌려 생면 파스타 팝업을 열었다. 취업의 기회만을 마냥 기다리기보다 자신들이 믿는 맛의 가치를 직접 선보이자는 절박하면서도 용기 있는 시도였다.
건면 중심의 정형화된 파스타가 주를 이루던 시장에서, 당일 뽑아낸 생면의 섬세한 텍스처와 정교한 소스 유화가 맞물린 두 셰프의 접시는 미식가들의 이목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작은 팝업 공간에서 시작된 입소문은 케이터링 요청으로 이어졌고, 이는 두 사람에게 독자적인 공간을 꾸릴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오직 손끝의 기술과 맛에 대한 확신으로 문을 연 페리지는, 오픈 직후부터 미식 씬의 중심에 서며 단숨에 예약이 가장 치열한 레스토랑으로 자리 잡았다.
두 개의 시선이 맞닿아 빚어내는 밸런스
임홍근 셰프(좌), 페리지의 파스타 (우)
한 주방을 이끄는 부부 셰프지만 두 사람이 요리를 풀어내는 템포와 시선은 확연히 다르다. 임홍근 셰프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촘촘하게 채워 넣는 ‘깊이와 복합성’의 건축가라면, 신가영 셰프는 손님의 입장에서 요리의 피로도를 덜어내는 ‘절제와 균형’의 눈을 가졌다.
임 셰프는 일곱에서 여덟 가지에 이르는 육수를 바탕으로 버터와 오일을 정밀하게 유화시키며 맛과 향의 층위를 집요하게 쌓아 올린다. 한 접시 안에 단번에 드러나지 않는 조리 공정을 세밀하게 설계해 소스의 농도와 깊이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방식이다. 반면 신 셰프는 지나치게 묵직해질 수 있는 흐름을 경계하며, 원재료 본연의 풍미가 직관적으로 닿도록 불필요한 기교를 덜어낸다. 코스를 끝까지 비웠을 때 손님이 느낄 편안함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요리 중인 신가영 셰프
메뉴를 개발하며 의견이 부딪힐 때마다 두 사람은 말로 설득하기보다 직접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먹어보며 조율한다. 서로의 감각을 존중하며 한 번씩 시도해 보는 이 명료한 원칙 덕분에, 임 셰프가 소스에 묵직한 깊이를 부여하면 신 셰프가 그 무게를 가다듬으며, 페리지의 접시는 치우침 없이 깊으면서도 마지막 한 입까지 부담 없는 독보적인 균형을 완성한다.
하나의 흐름, 완성도를 향한 집념
‘페리지(Perigee)’의 테이블
페리지는 본래 와인 한 잔에 파스타 단품을 곁들이는 캐주얼한 알라카르트 업장으로 출발했다. 좋아하는 파스타를 주문해 와인과 함께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자유로운 파스타 바 문화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방을 운영해 나가며 점차 한 접시의 단품 메뉴만으로는 계절 식재료의 다채로움과 세심한 조리 테크닉의 스펙트럼을 온전히 다 담아내기 어렵다는 한계와 갈증을 마주했다.
요리의 순서와 온도감, 맛의 완급, 서비스의 호흡까지 정밀하게 설계해 하나의 완결된 경험으로 보여주기 위한 코스 다이닝으로의 전환은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단품 하나로는 다 담아낼 수 없었던 다채로운 생면의 형태와 제철 식재료의 뉘앙스를 하나의 미식 이야기로 엮어내며, 페리지는 자신들의 요리 세계를 한층 더 깊게 확장해 냈다. 본래 두 사람이 애정을 가졌던 일상 속 편안한 단품 파스타의 매력은 두 셰프의 또 다른 브랜드인 ‘파티나(Patina)’로 독립시켜 풀어내며 두 공간의 정체성을 뚜렷이 갈랐다.
손끝의 텍스처와 감각이 교차하는 코스
봉골레 스파게티니(좌), 스노우크랩 스트로짜프레띠(우)
페리지의 봉골레 스파게티니는 면의 물성부터 다르다. 일반적인 생면과 달리 약 2주 반 동안 여러 방식을 거쳐 세심하게 건조해 낸 스파게티니 면은 겉은 매끄러우면서도 씹을수록 밀도 높은 쫀득함을 선사한다. 전복과 모시조개, 아스파라거스가 어우러진 은은한 바다의 감칠맛 위로 신선한 방아 잎이 과감하게 피어오르고, 익숙한 조개의 풍미를 덮을 만큼 선명하게 퍼지는 방아의 향은 전형적인 봉골레의 문법을 한국의 제철 허브로 산뜻하게 뒤흔든다.
시각과 미각의 대비가 돋보이는 스노우크랩 스트로짜프레띠는 오징어 먹물을 사용해 짙은 검은빛을 띠면서 투박하게 비틀어 꼬아낸 면을 사용한다. 오일 베이스에 브라운 버터의 묵직하고 고소한 풍미, 달큼한 대게살과 짭조름한 어란 가루가 쫄깃하게 씹히는 면의 굴곡진 틈마다 촘촘하게 엉겨 붙어 씹을 때마다 깊은 바다의 감칠맛을 폭발시킨다.
여름의 단맛을 담아낸 보토니 파스타
이탈리아어로 단추를 뜻하는 보토니는 여름의 단맛을 동그란 라비올리 안에 압축해 담아냈다. 얇게 빚어낸 만두피 형태의 보토니를 베어 물면 달콤한 옥수수가 톡하고 터져 나온다. 접시 바닥에 깔린 옥수수 소스와 짭짤한 프로슈토, 향긋한 방아 오일, 그리고 산미를 품은 크렘 프레시(Crème Fraîche)가 어우러지며, 자칫 무거울 수 있는 곡물의 단맛을 새콤하고 고소한 입체감으로 정돈한다.
메추리 요리(좌)와 수박 그라니따, 코코넛 아이스크림(우)
파스타 외의 디시에서도 디테일은 이어진다. 정밀한 불 조절과 온도 제어로 완성한 메추리 구이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텍스처를 구현했다. 바삭하게 씹히는 겉면의 크럼블이 메추리 특유의 짙은 육향과 어우러져 경쾌한 식감을 만들고, 발효 귤 소스의 은은한 산미와 감칠맛, 향긋한 양송이버섯이 고기의 무게감을 산뜻하게 받쳐준다.
얼음처럼 서걱거리며 녹아내리는 수박 그라니따와 코코넛 아이스크림 역시 수박의 청량함과 부드러운 코코넛의 단맛, 그리고 톡 터지는 핑크페퍼의 은은한 스파이스가 맞물려 산뜻한 인상을 남긴다.
궤도를 돌아 마침내 도달할 하나의 지점
트렌드가 빠르게 소비되고 사라지는 서울의 외식 시장 속에서 페리지가 지켜내고자 하는 것은 결국 ‘페리지다운 이야기’다. 수많은 레스토랑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치열한 생존의 장 속에서, 페리지는 단기적인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의 내실을 다져왔다.
초창기 페리지가 해외 주방에서 익힌 클래식한 문법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데 집중했다면, 지난 5년간 서울에서 쌓아 올린 시간은 두 셰프에게 또 다른 시야를 열어주었다. 전통의 뼈대를 흔들지 않는 선에서 방아 잎으로 허브의 향취를 변주하거나 국내 제철 식재료의 감칠맛을 섬세하게 엮어내는 시도는 페리지의 요리를 더욱 독창적인 위치에 올려놓는다.
페리지(Perigee) 외관
두 젊은 셰프들의 요리는 단순히 서구의 레시피를 모방하는 단계를 지나, 서울이라는 로케이션과 시간 위에서 숙성된 ‘시간이 만들어준 한국을 담은 이탈리안’이라는 명확한 정체성을 향해 묵묵히 나아가고 있다. 정직한 제면과 소스의 밀도로 채워가는 페리지의 주방은, 앞으로 서울의 다이닝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단단하고 설득력 있는 미식의 미래를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