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시작해 시드니와 홍콩을 거쳐 방콕에 닿기까지, 한식의 뿌리는 지키되 그 표현을 담대하게 넓혀온 이상근 셰프의 이야기
한국의 정체성이 태국의 환경과 만나는 레스토랑
2025년 2월, 태국 방콕에 모던 한식 레스토랑 이상(I-Sang)이 문을 열었다. 한국에서 요리를 시작해 호주 시드니와 홍콩을 거친 이상근 셰프가 이끄는 레스토랑이다. 레스토랑 이름 ‘이상(I-Sang)’은 이상근 셰프의 이름 앞 두 글자에서 따온 동시에, 한국어로 ‘이상(ideal)’을 뜻한다. 전통과 혁신, 익숙함과 호기심, 한국과 세계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온 셰프의 요리 여정을 담은 이름으로, 한식의 가능성을 넓혀가려는 그의 방향성을 보여준다.
이상은 개업 이듬해인 2026년 미쉐린 가이드 태국의 셀렉티드 레스토랑에 이름을 올렸다. 이와 함께 미쉐린 가이드는 이상근 셰프가 여러 나라에서 쌓은 경험을 간결한 테이스팅 메뉴에 담아 한국의 뿌리와 태국 식재료를 영리하게 연결한다고 표현한다,
이상은 레스토랑을 설명하는 문구로 ‘Where Korean soul meets Thai land’를 내세운다. 여기서 ‘Korean soul’은 전통적인 한국의 맛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음식에서 출발해 시드니와 홍콩을 거치며 축적한 이상근 셰프의 경험과 감각, 그리고 그 중심을 이루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리킨다. ‘Thai land’는 지금 그가 생활하는 태국의 식재료와 식문화, 방콕에서 만나는 사람과 환경을 뜻한다. 자신의 경험과 정체성을 더해 지금 이곳에서만 가능한 음식을 만드는 것. 이것이 이상근 셰프가 방콕에서 전개하는 한식의 출발점이다.
2026년 미쉐린 가이드 태국의 셀렉티드 레스토랑에 선정된 이상
요리를 선택한 소년, 세계를 경험하며 자신만의 방향을 찾다
이상근 셰프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가 부엌에서 요리하는 모습을 자주 지켜봤다. 때때로 요리를 도와드릴 때면, 책상에 오래 앉아 공부를 할 때와 달리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이런 경험을 계기로 중학생 때 요리학원의 한식 자격증반에 등록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요리를 배웠다.
경기대학교 재학 중에는 밍글스에서 약 1년 동안 홀 스태프로 파트타임 근무했고 이후 주방에 자리가 생기면서 홀과 주방을 오갈 기회를 얻었다. 이상근 셰프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서비스와 주방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고, 요리를 바라보는 시야도 한층 넓어졌다. 군 복무 이후에는 아버지의 권유로 호주 워킹홀리데이에 도전, 벤틀리 레스토랑 그룹(Bentley Restaurant Group)이 운영하는 유럽식 바 앤 다이닝 레스토랑 모노폴(Monopole)에서 코미 셰프로 첫 정규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에는 같은 그룹의 씨푸드 레스토랑 시러스(Cirrus)에서 약 2년 반,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벤틀리(Bentley Restaurant)에서 약 2년 동안 근무하며 다양한 조리 기술과 주방 운영 방식을 익혔다.
당시 이상근 셰프는 자신이 한식을 하는 셰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전환점은 강민구 셰프가 홍콩 한식구(Hansik Goo)의 운영을 맡기면서 찾아왔다. 이 셰프는 한식구 오픈을 준비하는 동안 밍글스 주방에서 수많은 메뉴를 함께 개발하며 한식을 다시 깊이 공부했다. 이후 2020년 한식구의 파운딩 헤드 셰프로 합류해 자신만의 한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셰프가 강민구 셰프에게서 배운 것은 한식에 관한 지식만이 아니었다. “이미 이룬 것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의심하고 탐구하는 자세, 그리고 한 접시를 끝까지 더 나은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집요함이 무엇보다 인상 깊었습니다.” 자신만의 스타일과 철학을 확고하게 구축했음에도 하나의 요리를 완성된 것으로 여기지 않고 계속해서 고민하는 이런 태도는, 이후 그가 메뉴를 개발하고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기준이 되었다.
한식구를 준비하던 시기, “외국인이 한식을 하는 것 같다”는 강민구 셰프의 한 마디는 스스로의 요리를 근본부터 돌아보게 했다. 당시 이 셰프는 자신이 한식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하기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요소를 변형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강민구 셰프가 한식구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은 무엇보다 진정성 있는 한식이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하더라도 한식의 뿌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셰프의 관점과 철학이 현지 손님이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요리의 형태로 테이블까지 전달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주방에서 함께 일하는 강민구 셰프와 이상근 셰프
“처음에는 정통 한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한식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의 문화와 이해 방식에 맞춰 한식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한식의 영역을 확장하고 발전시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됐죠. 다만 한식의 뿌리와 정체성만큼은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홍콩은 음식에 관한 지식과 경험이 깊은 도시이고 손님들은 고기의 굽기나 음식의 미세한 온도 차이까지 알아차릴 만큼 세심했다. 요리사에게는 까다로운 환경이었지만, 접시에 담긴 기술과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인정해주는 손님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상근 셰프는 홍콩에서 일한 시기만큼 ‘한식이란 무엇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성장했던 적이 없다고 회상한다.
한식에 대한 이상근 셰프의 이런 고민과 노력은 빛을 발했다. 한식구는 2022년 1스타를 받았고 이 셰프는 2023년에 미쉐린 영 셰프 어워드를 수상했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미식 도시인 홍콩에서 한식으로 첫 미쉐린 스타를 받았다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러웠습니다. 제 개인의 성취를 넘어, 세계 무대에서 한식이 만들어가고 있는 흐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기를 바랐습니다.”
한식의 철학은 지키며 다양한 모습을 제안하는 레스토랑 이상
홍콩에서 약 4년을 보낸 뒤 이상근 셰프는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마침 코로나19 이후 처음 여행한 도시가 방콕이었다. 스트리트 푸드부터 파인다이닝까지 음식의 스펙트럼이 넓고, 서양식과 중식, 일식이 각자의 방식으로 깊게 발전한 도시였지만 한식은 그만큼 다양한 형태로 영역을 확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공백은 의문인 동시에 도전해볼 만한 가능성으로 다가왔다.
홍콩이 오랜 역사와 경험을 바탕으로 깊고 구체적인 취향을 발전시켰다면, 방콕은 변주와 다양성, 창의성에서 강한 에너지를 보인다. 이상근 셰프는 이곳에서라면 자신이 지금까지 배운 것과 태국의 환경을 연결해 또 다른 한식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상근 셰프는 한식의 본질이 하나의 식재료나 레시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요리하는가’라는 철학에 있다고 본다. 발효로 깊은 맛을 만들고 계절의 식재료를 존중하며, 밥과 국, 반찬이 함께 한 끼를 이루는 것처럼 오랫동안 축적된 한식의 사고방식이 한식을 한식답게 만든다는 것이다. 반대로 식재료와 조리 방식, 플레이팅은 장소와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상은 외국인들에게 익숙한 비빔밥이나 코리안 바비큐, 김밥, 김치에서 나아가 한식이 지닌 훨씬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납작한 한국식 젓가락과 숟가락을 사용하고 직접 빚은 전통주를 제공하며, 메인 코스에는 밥과 국, 반찬을 함께 내는 반상을 선보인다. 한국적인 맛뿐 아니라 한식을 먹는 방식과 문화까지 전달하기 위해서다.
그 위에는 태국의 식재료와 감각이 더해진다. 현지에서 일반적으로 고급 재료로 인식되지 않는 메기를 고추장을 활용한 소스와 연결하고, 파파야와 타이 바질, 민트로 겉절이를 만든다. 익숙한 한식의 뿌리 위에 태국의 요소를 더해 새로운 한식의 모습을 전달하고 다음 요리가 궁금해지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다.
레스토랑 이상(I-Sang)의 홀 및 프라이빗 다이닝 룸
이상근 셰프의 철학이 가장 잘 드러난 디쉬는 들기름 칼국수다. 출발점은 홍콩에서 즐겨 찾던 레스토랑 선홍키에서 맛본 생선면 요리였다. 셰프가 직접 뽑아 볶은 면은 단순한 구성이었지만 맛과 식감, 향이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이후 한국의 고기리 막국수를 먹었을 때 그 경험이 다시 떠올랐다.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깊은 국수의 가능성이었다.
이상의 시그니처 디쉬인 들기름 칼국수
그는 향이 깊고 풍부한 한국의 들기름을 요리의 중심에 놓았다. 들기름도 이탈리아 요리의 올리브오일처럼 음식의 성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재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여기에 태국을 대표하는 식재료인 새우를 사용했다. 새우 무스를 반죽에 넣어 칼국수 면을 만들고 면 자체에 감칠맛과 풍미를 더했다. 홍콩에서 얻은 영감과 한국의 들기름, 태국의 해산물이 한 그릇 안에서 이어지는 요리다.
두 번째 시그니처는 코리안 프라이드 크랩(Korean Fried Crab), KFC다. 아이디어는 홍콩 한식구에서 시작됐다. 당시에는 한국식 치킨 양념에 홍콩의 대표적인 식재료인 삼황계(three yellow chicken)를 사용했다. 방콕에서는 치킨 대신 소프트 셸 크랩을 택했다. 한국적인 양념과 조리의 아이디어는 유지하면서 태국의 환경에 맞게 재료를 바꿔 전혀 다른 맛과 성격을 만들었다.
이상의 코리안 프라이드 크랩(KFC)
새로운 메뉴를 구상할 때 이상근 셰프는 맛에 앞서 ‘왜 이 요리가 지금 이곳에 존재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자신이 지나온 도시에서 만난 맛과 기술을 태국의 식재료로 다시 해석하고, 지금 이곳에서 필요한 이유를 찾는다. 그에게 시그니처 디쉬는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과 사람을 만나며 계속 발전하는 과정이다.
방콕에서 새로운 한식을 꿈꾸며
이상근 셰프는 방콕에서 한식을 바라보는 시선이 분명히 달라지고 있다고 느낀다. 한국을 직접 여행하고 여러 종류의 한식을 경험한 손님이 늘면서 레스토랑에 기대하는 내용도 구체적으로 변했다. 단순히 한국 음식이라는 이유로 찾기보다 요리에 담긴 이야기와 철학, 식재료와 조리 방식까지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새로운 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이는 방콕의 분위기는 이상이 새로운 형태의 한식을 제안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이제는 한식을 처음 소개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한식이라는 장르 안에서 얼마나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지를 보여줄 차례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맛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그 뿌리를 지키면서도 태국에서만 태어날 수 있는 요리를 만드는 것. 손님이 한국적인 요소를 알아보는 동시에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태국의 재료를 다시 만나게 하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다음 단계다.
이상은 어느덧 운영 1년 반에 접어들었지만, 방콕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대형 호텔이나 유명 레스토랑에 비해 좋은 인재를 확보하는 것도 어렵고 식재료 조달 환경도 홍콩과 다르다. 홍콩에서는 최상급 식재료와 한우를 안정적으로 구할 수 있었고, 직접 수입할 때의 통관도 비교적 수월했다. 태국에는 훌륭한 현지 식재료가 많지만 해외 식재료를 들여오는 환경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이상근 셰프는 이 제약을 태국 식재료를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로 바꾸고 있다. 현지 재료를 정확히 알고 활용하는 일이 결국 이상만의 경쟁력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요리 중인 이상근 셰프
이상근 셰프는 이상이 방콕에서 한식 파인다이닝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레스토랑이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전통적인 파인다이닝의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지는 않는다. 흰 테이블보와 엄격한 서비스, 격식을 앞세우기보다 음식의 완성도는 유지하면서도 편안하고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경험을 지향한다. “파인다이닝과 캐주얼 다이닝의 경계 어딘가에서, 더 많은 사람이 부담 없이 한식의 새로운 가능성을 경험할 수 있는 레스토랑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앞으로 더 깊이 탐구하고 싶은 주제는 발효다. 한국의 발효가 다른 나라의 발효 문화와 무엇이 다른지, 한국의 지리와 기후, 생활 방식이 지금의 발효를 어떻게 만들었는지까지 공부하고자 한다. 발효 식재료를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원리와 배경을 이해해 자신만의 요리로 풀어내는 것이 다음 과제다.
5년, 10년 뒤에도 그는 한국이 아닌 어딘가에서 한식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그동안 해외에서 경험한 도시와 문화가 자신의 요리를 만들었듯, 앞으로도 새로운 환경 속에서 한식의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동시에 자신만의 브랜드와 철학을 더욱 분명히 구축하고, 파인다이닝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와 가격대의 한식으로 영역을 넓히고자 한다. 한식의 본질을 놓치지 않으면서 더 많은 사람이 부담 없이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것 이상근 셰프가 그리고 있는 미래는 한식의 뿌리를 이해한 뒤 더 많은 땅과 사람에게 닿게 하는 확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