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아온 시간의 이름, 번들 이용우 셰프
작가 Susan Cho

장작 한 단을 뜻하는 '번들(Bundle)'에서, 이용우 셰프가 13년간 쌓아온 시간을 강화도의 흙과 장작불의 온기로 풀어낸다.

이용우 셰프에게 요리란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포개어온 시간의 총합이다. 요리를 시작하고 다이닝을 열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는 하나의 경험을 넘어설 때마다 그것을 자신 안에 쌓아왔다. 그 다짐을 고스란히 담은 이름이 바로 '번들(Bundle)'이다. 장작 한 단을 가리키는 이 단어를 그는 자신의 레스토랑 이름으로 골랐다. 그가 지나온 시간들과 13년여 간의 경험을 하나로 묶어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우리 땅에서 나고 자란 식자재들을 장작불의 직관적인 온기와 함께 유기적으로 엮어내겠다는 단단한 다짐을 '번들'이라는 이름에 함께 녹여냈다.

 

남들보다 이른 결단, 그리고 도약

이용우 셰프의 시작은 또래보다 일렀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치르기도 전에 군 생활을 시작해, 전역 후 그는 여러 고생 끝에 스스로 유학 자금을 마련했다. 남들보다 빠르고 고된 선택이었지만, 그는 이를 회피가 아닌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나를 죽이지 못할 정도의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는 문장을 마음에 새기며 스스로를 다잡았고, 그 시절 다져진 담대함과 도전 의식은 이후 그가 내린 모든 선택을 관통하는 단단한 뼈대가 되었다.

 오랜 시간이 담긴 이용우 셰프의 음식들

이후의 선택들 역시 일관된 결을 지닌다. 스스로 일군 유학비를 들고 무작정 호주 시드니로 건너간 것도, 요리학교를 졸업한 뒤 여러 주방에서 부딪히며 인정받은 것도, 훗날 한국에서 패딩턴, 해리스를 통해 쌓아 올린 안정적인 매출과 명성을 접어두고 파인다이닝이라는 길로 다시 뛰어든 것도 모두 같은 궤적 위에 있다.

 

호주에서 10년의 시간을 보내며 그가 얻은 것은 요리 테크닉 이전에 주방이라는 열정의 공간을 대하는 태도였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모여든 사람들과 하나의 목표를 향해 안 되면 될 때까지 부딪히는 과정에서 동료들과의 깊은 신뢰가 생겼고, 이는 곧 스스로를 지탱하는 절대적인 자신감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시드니 최정상급 파인다이닝인 세피아(Sepia)에서 스태프가 아닌 손님으로 겪었던 환대는 그가 요리 인생의 청사진을 그리게 해준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 순간에 매료되어 곧바로 그곳에서 스타지를 시작했고, 셰프의 희생과 절제된 헌신이 타인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직접 지켜보며 그는 이 일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언젠가 나도 이런 다이닝을 열어 손님들에게 같은 황홀함을 선물하겠다는 목표는 그때부터 비로소 뚜렷해졌다.

 

패딩턴과 해리스, 신뢰로 지은 집

공사 현장의 마감 하나까지 직접 지키며 공간 곳곳에 자신의 취향과 손길을 채워 넣은 이용우 셰프.(좌), 바 형태의 구조를 통해 주방과 객석의 경계를 허물고 손님과 눈높이를 맞추는 번들의 모던한 다이닝 공간(우)

호주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한국에서 차렸던 첫 공간은 패딩턴, 그리고 이어 용산에 선보였던 해리스(Harris)였다. 식당의 이름은 그가 호주에서 살던 정겨운 거리인 해리스 스트리트에서 가져왔다. 오래된 저택을 개조해 만든 해리스를 그는 호주의 집에 소중한 손님들을 초대해 따뜻한 온기를 나누듯, 스스로의 집처럼 아끼고 다듬었다.

외진 입지였지만 손님들과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지며 늘 예약이 어려운 식당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성공적인 운영 뒤에서도 그의 가슴속에는 오랫동안 접어두었던 파인다이닝에 대한 열망이 타오르고 있었다. 오픈과 동시에 들어갈 막대한 비용과 임대료, 오랜 시간 수익이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지만, 그는 도전을 미루지 않았다. 패딩턴과 해리스를 거치며 자신을 믿어준 손님들과의 단단한 신뢰가 있었기에 그는 확신을 갖고 번들이라는 새로운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특이하지만, 거부감 없이

단단하고 묵직한 벽돌 외관 위, 셰프의 철학을 담아낸 번들(Bundle)의 명판(좌), 시간과 기다림을 통과하며 디시 위에 깊은 레이어를 더해주는 선반 위의 수제 비네거와 발효 효소 병들.(우)

번들의 주방 한켠에도 붙어있듯, 번들, 그리고 이용우 셰프가 지향하는 슬로건은 독창적이지만 결코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는 뜻의 'Be rare, but never unapproachable'이다. 해리스 시절의 캐주얼하고 유쾌했던 감각이 번들에서는 좀 더 정돈되고 성숙한 형태로 이어졌고, 한국이라는 나라와 그 식자재를 그의 세계관 안에서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이러한 계절감과 식재료의 진정성을 구현해낼 수 있는 근거지는 강화도에 위치한 농장이다. 해리스 시절부터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주 직접 찾아가 함께 일구어온 이 농장은 바닷가 바로 앞에 있어 사계절 내내 거친 해풍을 맞으며 자란 자생 작물과 허브를 내어준다. 시각적인 아름다움이나 정형화된 형태를 위해 맛을 타협하기보다, 조금 울퉁불퉁하고 제각각일지라도 재료 본연이 가진 맛과 색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강화도의 흙과 바람 속에서, 그리고 레스토랑에서도 매일 이어지고 있다.

 

접시 위에 세공된 시간

여름의 시작을 상징하는 번들의 정갈한 타틀렛 디시, '주키니 플라워'.

번들에서 피어나는 디시들에는 이러한 셰프의 고집과 시간의 가치가 오롯이 세공되어 있다. 코스의 서막을 여는 '주키니 플라워(Zucchini Flower)'는 여름의 입구를 상징하는 호박꽃 속에 장작불로 구워낸 키조개 관자와 고소한 우유 커드를 정성껏 채워 넣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를 김으로 바삭하게 만든 타틀렛 위에 올려 마늘잎 아이올리를 곁들이는데, 여름 호박꽃의 산뜻함으로 시작해 장작 직화의 은은한 향과 고소함이 입안 가득 감싸 돌며 코스의 화려한 출발을 알린다.

강화도 농장의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제철 작물의 본질을 최소한의 불길로 끌어올린 '강화도'.

'강화도(Gangwhado)'는 계절의 색과 맛을 한눈에 보여줄 수 있는 디시다. 직접 키운 작물의 본질을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장작불에서 최소한의 조리 과정만 거친 뒤, 흑마늘 아이올리와 잣 밀크, 농장 입구에서 자라는 레몬 머틀 나무 오일로 마무리한다. 화려한 가공 없이 재료 본연의 맛과 색을 그대로 드러내는 이 접시는, 번들이라는 레스토랑이 지닌 정체성과 시간의 기다림을 가장 밀도 있게 보여주는 디시라고 할 수 있다.

기러기 알 노른자 잼, 사바용 폼, 그리고 요리의 출발점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기러기 깃털 모양의 스몰 바이트(좌), 하동에서 직접 담근 매실 효소의 발효 산미가 은은하게 감도는 번들의 플랑, '하동 매실'.(우)

이용우 셰프의 기법과 스펙트럼이 가장 잘 응축된 한 접시를 꼽는다면 단연 '기러기 알(Wild Goose Egg)' 디시다. 호주 주방에서 다루던 머스코비 덕 품종을 한국에서 찾던 중 식용 기러기를 발견하면서 시작된 이 메뉴는, 한국과 아시아권 코스에서 내어주는 계란찜이나 자완무시를 기러기 알로 풀어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노른자는 잼 형태로 짙게 정제하고, 흰자는 태운 다시마 오일과 머랭 쿠키로 풀어내어 사바용 폼과 함께 부드러운 찜의 식감을 연출했다. 여기에 태운 야채 재(Vegetable Ash)로 훈연 향을 입히고, 들깨·서리태·귀리·보리·밀을 넣어 아침마다 직접 구워내는 오곡 브리오쉬를 곁들여 지방의 고소함과 산미가 균형을 이루도록 했다. 접시 한편에 놓인 기러기 깃털 모양의 스몰 바이트는 요리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조용히 알려주는 디테일이다.

번들의 시간이 깊어지듯, 병 속에서 조용히 익어가는 발효의 결실(좌), 13년 요리 여정의 시간과 진정성을 공간과 접시 위에 담아내는 이용우 셰프(우)

번들의 디저트 '하동 매실(Hadong Maesil)' 역시 기다림이 만들어낸 성숙한 여운을 품고 있다. 클래식 프렌치 디저트인 플랑을 한국의 식자재로 재해석하고자 했던 그는 2년 전 하동에서 직접 담가둔 매실 효소를 베이스로 삼았다. 숙성된 매실의 상큼한 발효 산미가 플랑의 부드러움과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농장에서 키운 라벤더 꽃 카라멜과 야생 꿀 튀일이 더해지며 깊고 정갈한 마무리를 완성한다.

 

손님과 함께 자라는 삶의 무대

패딩턴, 해리스를 거쳐 번들에 이르기까지, 이용우 셰프가 차곡차곡 쌓아온 시간을 보여주는 번들 한편의 포토월.

번들의 미식 경험은 접시 위에서 그치지 않고 공간 전체의 질감으로 완성된다. 공사 현장의 작은 마감 하나까지, 번들의 곳곳에는 이용우 셰프의 손길이 배어 있다. 모던한 나무 소재들은 친숙하면서도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고, 과거 해리스가 오래된 저택이 주는 클래식하고 따스한 집 같았다면, 번들은 정돈되고 모던한 바 구조를 통해 주방과 객석 사이의 벽을 허물었다. 바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은 눈앞에서 피어오르는 장작불의 열기와 요리 과정을 감상하며, 셰프와 팀이 건네는 따뜻한 환대 속에서 편안한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이용우 셰프가 번들을 통해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살아온 진실한 시간 그 자체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살아온 경험이 깊고 풍성해지듯, 패딩턴의 경쾌했던 시절을 함께했던 손님들은 해리스의 따뜻한 저택으로 자리를 옮겨왔고, 이제는 고단하거나 기쁜 일상의 순간을 나누기 위해 번들의 모던한 다이닝 테이블로 찾아오고 있다. 번들은 그렇게 손님과 함께 성장하고, 또 나이 들어가는 레스토랑이 되고자 한다. 식당이 단순히 음식을 파는 곳을 넘어, 손님의 인생 한 페이지마다 함께하며 삶의 각 단계를 나란히 걸어가는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 그가 셰프로서 느끼는 가장 큰 영광도 바로 이 깊은 유대감에 있다. 그래서인지 5년, 10년 뒤의 모습을 묻는 질문에도 그는 거창한 명예 대신 지금처럼 손님 곁에서 접시를 내어놓는 자리를 이야기했다. 셰프라는 직업이 지금까지 자신에게 최고였듯, 이 희생과 헌신의 가치를 다음 세대에게도 전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장작 한 단처럼 차곡차곡 쌓아 올린 이용우 셰프의 시간은, 오늘도 번들의 불꽃 위에서 깊고 은은하게 타오르고 있다.

따뜻한 나무의 질감과 정갈한 기물이 조화를 이루며 손님들에게 온전한 휴식과 환대를 선사하는 프라이빗 룸 공간

단락

Writer 조정인(Susan Cho)
Editor 최진우(Jinu Choi)
Photographer 조정인(Susan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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