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우 셰프가 직접 빚은 누룩과 숯불 위에서, 부르(Vuur)만의 요리가 완성된다.
요즘 외식업계에는 젊고 재능 있는 셰프들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다채로운 색깔의 레스토랑을 선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손님들 또한 완벽하게 세팅된 '완성형' 레스토랑만을 찾기보다는, 셰프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궤도를 수정해 나가는 '과정' 자체에 기꺼이 동참하는 추세다. 이처럼 주목받는 영셰프들의 층이 한층 두터워지고 있다는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네덜란드어로 '불'과 '열정'을 뜻하는 레스토랑 '부르(Vuur)' 또한 그중 하나다. 이 공간을 이끄는 건 아직 젊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이력을 지닌 박현우 셰프다. 91년생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그가 거쳐온 주방의 이름들은 지난 십여 년 한국 파인다이닝의 흐름 그 자체를 보여준다.
클래식 프렌치에서 발효로, 새로운 관점
그의 요리 여정은 숙명여자대학교 르 꼬르동 블루에서 시작해, 호주 워킹홀리데이 시절 캔버라의 한 5성급 호텔을 거쳤다. 귀국 후에는 다이닝인스페이스와 라미띠에 등 국내 유수의 파인다이닝을 두루 거치며 클래식 프렌치의 소스와 테크닉을 몸에 새겼다. 이 경험을 통해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결이 다른, 좀 더 정교하고 절제된 조합의 세계를 익혔다고 그는 회상했다. 클래식 프렌치를 파고들던 그에게 방향을 바꾼 계기가 찾아온 건 임프레션에서였다. 오픈 멤버로 합류한 박 셰프는 당시 국내에서 흔치 않았던 발효와 자연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요리를 서현민 셰프와 함께하며 배울 수 있었다. 그 파격적이고 신선한 시도들을 가장 가까운 곁에서 지켜보며, 그는 '아, 내가 믿고 있던 클래식 프렌치가 미식 세계의 전부는 아니구나'라는 묵직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러한 긍정적인 충격은 그의 요리 스펙트럼을 크게 넓히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후 김세경 셰프의 세스타에서 헤드 셰프를 지내며 완성도 높은 요리는 물론 업장 전반을 아우르는 운영 감각까지 익힐 수 있었다. 타코, 빠에야 같은 캐주얼하고 대중적인 장르까지 폭넓게 흡수하며 셰프로서의 시야를 훌쩍 넓힐 수 있었다고 그는 웃어 보였다.
매일 밤 역동적인 요리가 탄생하는 무대, 부르의 오픈 키친.
그렇게 탄탄한 내공을 쌓아온 그에게 '부르'는 난생처음 홀로 주방 전체를 책임지고 자신의 철학을 증명해야 하는 첫 무대였다. 처음 그가 이곳에 합류했을 때만 해도 부르는 와인 바에 더 가까운 형태를 띠고 있었다. 박 셰프는 무작정 회사에 자신의 요리 스타일만을 고집하며 투정을 부리지 않고, 그동안 쌓아온 운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우선 '매출'이라는 명확하고 확실한 숫자로 회사에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였다. 묵묵히 결과를 만들어내며 얻어낸 굳건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는 부르를 지금의 다이닝 공간으로 개편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호기롭게 시작한 셰프 본연의 첫걸음이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막상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신만의 색깔을 온전히 접시에 담아내려다 보니, 오히려 스스로의 한계와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그는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이 보이지 않는 벽을 깨기 위해 그는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레스토랑의 근간을 거의 새로 짜다시피 했다. 직접 르방을 배양해 사워도우를 굽고, 낯선 발효의 세계를 집요하게 파고들며 마침내 부르만의 독창적인 요리 문법을 정립해 나갔다.
불과 발효, 부르의 두 축
부르의 코스는 발효와 자연주의를 바탕으로 완성된다
그렇게 다듬어진 부르의 요리는 자연주의와 발효라는 두 축 위에 있다. 그는 요리의 기본인 소금과 간장조차 기성품을 쓰지 않는다. 직접 빚은 누룩으로 만든 소금, 버섯을 오래 우려 숙성시킨 간장은 시판 재료로는 낼 수 없는 층위의 감칠맛을 만든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요리의 '킥'이다. 메뉴를 짤 때도 그는 계절마다 시장에 나가 그때 나올 법한 재료를 먼저 가늠하고, 그 재료가 요리의 방향을 정하도록 두는 순서를 지킨다.
요리를 닮은 공간, 그리고 서비스
사막 한복판에 뚝 떨어진 듯 거칠면서도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부르의 내부 전경.
부르의 공간이 뿜어내는 분위기 역시 요리의 거칠고 자연스러운 결을 닮아 있다. 문을 열면 사막 한복판에 뚝 떨어진 듯한, 우드 앤 파이어 다이닝의 거칠고도 아늑한 분위기가 펼쳐진다. 홀 정중앙에 다리 밑까지 훤히 드러나게 자리 잡은 오픈 키친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동적이고 뜨거운 공연장 같다. 요리가 완성되면 다소 번거롭더라도, 주방 스태프들이 자신이 만든 요리를 끝까지 책임지고 직접 접시를 들고 손님 테이블로 다가가 요리 탄생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건넨다. 현장에서 직접 피드백을 얻으며 좋은 요리사로 성장하길 바라는 셰프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대목이다.
'발효' 위에 계절을 얹다
잘 숙성된 토마토 발효 소스와 제철 단새우가 어우러지고, 은은한 라벤더 오일이 향긋한 여운을 남기는 부르의 '단새우' 디시.
본격적인 코스가 시작되면, 자연의 질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매끄러운 그릇 대신 거친 돌이나 다시마, 가리비 껍질 위에 무심한 듯 툭 얹어낸 요리들이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부르의 코스는 '단새우'로 시작한다. 오래 발효시킨 토마토 소스가 감칠맛과 산미의 균형을 잡고, 토마토 가죽과 세미드라이 토마토가 농축된 풍미와 쫀득한 식감을 더한다. 레몬타임의 허브 향과 바다포도의 미네랄감이 새우 본연의 신선함을 살리고, 마지막에 두른 라벤더 오일이 은은한 꽃향의 여운을 남긴다. 계절을 반영하는 것을 선호하는 셰프의 뜻에 따라, 원래 갑오징어를 염두에 두고 짰던 구성을 여름철 맛이 최고조에 오르는 단새우가 대신했다. 잘 숙성된 발효 소스 위에 신선한 제철 식재료를 과감하게 얹어내는 이 직관적인 형태는, 앞으로 부르가 장기적으로 그려나갈 요리의 출발점이자 셰프 스스로도 가장 깊은 애착을 갖는 대표적인 접시다.
바다의 흔적을 그대로 담아낸 '참가리비' 디시의 껍질 플레이팅.
'참가리비' 디시는 커다랗고 투박한 가리비 껍질 위에 고스란히 담겨 서빙된다. 부드러운 관자에 헤이즐넛 백미소 소스로 고소함과 감칠맛을 더하고, 톡톡 튀는 포도 살사가 과일 특유의 화사한 향과 기분 좋은 산미를 덧입혀 맛의 균형을 정교하게 잡아준다. 자칫 무겁거나 단조로워질 수 있는 틈은 발효한 알타리무 백김치의 아삭함이 채우며, 다음 접시로 넘어가기 전 입안을 정리해준다. 접시 위에 그대로 놓인 껍질은 그저 장식용이 아니라, 식재료가 나고 자란 바다의 본래 자리를 온전히 보여주려는 셰프의 습관에 가깝다.
뼈째 올린 과감한 시도가 돋보이는 메인 디시 '오골계'.
메인 디시인 '오골계'는 박 셰프의 태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접시다. 뼈가 고스란히 남은 까만 오골계 다리를 그대로 그릇 위에 올리는 건 다소 낯설고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과감한 시도지만, 그 이면에는 타협하지 않는 셰프의 고집과 자신감이 묻어난다. 가슴살에는 버섯 무스를 채워 촉촉한 육즙과 깊은 풍미를 잡았고, 다리살은 완자로 빚어 숯불에 구워내 은은하면서도 묵직한 불향을 입혔다. 레스토랑 이름 '부르'가 품고 있는 불의 에너지를 가장 직관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에 진하게 우려낸 오골계 주(jus)와 셰리 가스트릭을 더해 산미와 깊이의 균형을 맞추고, 곁들인 백김치가 자칫 무거울 수 있는 뒷맛을 산뜻하게 정돈한다. 함께 내는 오골계 뼈 버섯 콩소메에는 그가 직접 만든 버섯 간장이 더해져 복합적인 여운을 남긴다.
은은한 향을 품은 '연잎밥' 디시. 훈연 연어알과 샬롯 튀김이 어우러져 다채로운 식감을 선사한다(좌), 부드러운 관자와 헤이즐넛 백미소, 상큼한 포도 살사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참가리비'.(우)
부르의 '연잎밥'은 익숙한 형태 안에서 다채로운 맛을 낸다. 연잎에 쪄낸 찹쌀밥은 특유의 은은한 향을 품고 있다. 그 위로 얹은 참외무침과 발효 과일무 피클이 산뜻한 산미를 더하고, 숯불에 구운 그린빈과 다시마조림이 감칠맛의 균형을 잡는다. 여기에 훈연한 연어알과 샬롯 튀김을 곁들여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식감에 재미를 준다. 제철 식재료를 먼저 세워두고 그 위에 요리의 방향을 얹는 그의 습관처럼, 흔한 흰쌀밥 대신 깊은 향을 품은 연잎 찹쌀을 택한 것은 셰프의 탁월한 변주다.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 박현우 셰프의 균형
부르(Vuur)를 이끄는 박현우 셰프. 발효와 자연주의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요리 문법을 써 내려가고 있다
이 코스를 계속 다듬어가는 힘은 그의 욕심이다. 한 시즌 메뉴를 완성한 뒤에도 더 나은 조합을 찾아 헤매고, 한 시즌에 두세 번씩 메뉴판을 바꾸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만족했던 메뉴도 퇴근 후 문득 머릿속을 맴돌면, 다시 한 달을 매달려 새로 만들고 메뉴판을 다시 찍는다. 고단하고 번거로운 일이지만, 그는 그 과정 하나하나가 스스로 배우고 성장하는 감각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물론 그의 뚝심과 고집이 대중의 입맛을 외면한 채 예술성에만 기울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한동안은 낯선 발효 요리를 세상에 내놓고 증명하는 데 집중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손님들이 보여주는 반응을 차곡차곡 모아 왔다. 어떤 접시에 손님들의 젓가락이 가장 오래 머무는지, 어떤 향과 식감에서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지는지를 눈여겨봐 온 것이다. 그는 이렇게 쌓인 기록을 바탕으로, 셰프의 예술성과 대중의 기호 사이에서 가장 이상적인 지점을 찾은 메뉴들을 차례로 선보일 계획이다.
리더가 된 셰프, 그리고 부르의 다음
'불'과 '열정'을 의미하는 부르(Vuur)의 로고.(좌), 박현우 셰프는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최적의 접점을 치열하게 고민하며 디시를 낸다(우)
이제 박 셰프는 스승들의 그늘 밑에서 요리를 배우던 막내 시절을 지나, 부르의 주방을 이끌고 젊은 후배들을 키워내는 리더가 됐다. 소수 인원으로 운영되는 주방에서 그가 요구하는 건 시간을 채우는 조리가 아니라, 원리를 이해하고 탐구하려는 태도다. 공고 하나에 이력서가 백 장씩 몰리지는 않지만, 그는 소수의 팀원을 끈끈하게 가르치고 오래도록 함께 성장하는 쪽을 기꺼이 택했다. 그 애정과 노력 덕에, 오래 함께한 수셰프들과는 재료 하나만 꺼내도 서로 무슨 요리를 할지 아는 사이가 됐다.
"언젠가는 인테리어부터 주방의 세밀한 동선, 그리고 손님이 앉는 의자 하나까지, 처음부터 제 색깔을 온전히 입힌 부르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그렇게 포부를 밝힌 그는 뜨거운 불꽃을 치열하게 피워내고 긴 시간 조용히 발효시켜 완성한 테이블 위의 접시로, 매일 밤 새롭게 이 공간의 색깔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