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앞에 설 때는 늘 수트를 챙겨 입고, 예의를 갖춰 칵테일을 만드는 두 오너 바텐더. 엄도환과 임재진이 들려주는 르챔버의 시작, 그리고 17년째 이어온 인연.
Asia’s 50 Best Bars가 출범한 2016년 25위로 첫 리스트에 오른 르챔버는 2025년까지 10년 연속 50위 안을 지켰다. 단순한 바의 의미를 넘어 바텐더 인재 양성소로, 티앤프루프와 파인앤코 등 이곳을 거쳐 간 바텐더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고, 2022년 밍글스로 시작해 유용욱 바비큐, 본앤브래드 등의 레스토랑들과 이어진 협업도 당시 한국 바에서는 보기 드문 시도였다. 한국의 바 씬은 르챔버 전과 후로 나뉜다는 말도 있다.
손님과 르챔버가 처음 만나는 장소, 책장 문.
전형적인 스피크이지 바인 르챔버는 2014년 4월 지금 공간에 문을 열었다. 지하 공간에서 손님을 처음 맞이하는 것은 벽 한가득 꽂힌 책장이다. 가장 손때가 많이 간 ‘Le Chamber’ 제목의 책에 손을 뻗으니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문이 열렸다.
르챔버의 상징적인 백 바(좌), 미술 작품과 칵테일의 협업(우)
높은 층고와 넓은 바, 푹신한 가죽 소파, 공간을 압도하는 샹들리에가 그랜드 피아노를 비춘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그림은 르챔버의 새로운 실험과 연결된다. 작품 속 요소에서 영감을 받은 칵테일을 메뉴로 선보이는 것이다. 르챔버다운 새로운 시도이다. 클래식한 공간에서 마주한 엄도환 오너 바텐더는 쓰리피스 수트 차림이다.
수트 차림으로 바에 서는 엄도환 오너 바텐더
두 월드 클래스 챔피언의 새로운 시작
엄도환 바텐더의 첫 커리어는 2000년 리츠칼튼 호텔 서울에서 시작됐다. 대학 졸업반 시절 나간 호텔 실습에서 우연히 배정된 바텐더 타이틀은 그의 평생 직업이 되었다.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이었던 리츠칼튼 재직 중 2009년 출전한 디아지오 월드 클래스 코리아 대회는 그의 바텐더 커리어의 전환점이 되었다. 3등에 머문 그는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당시 2009년 우승자이자 현재 르챔버의 파트너인 임재진 바텐더를 만났고, 3위에 그친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한 뒤 훈련을 거듭했다. 이듬해 월드 클래스 코리아에서 우승했고, 글로벌 파이널에서는 Market Challenge 부문 1위와 종합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 경험은 그에게 해외 바 씬을 직접 보는 기회를 열어주었고, 창업을 결심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2010년 월드 클래스 코리아에서 우승한 뒤에 처음으로 게스트 바텐딩을 위해 해외에 나가서 놀란 거죠. 저는 오너 바텐더의 개념도 몰랐던 때인데 싱가포르나 홍콩에서는 오너 바텐더들이 바를 운영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어요. 왜 이런 생각을 못했지, 왜 우리는 이런 게 없지. 그때 내 바를 차려야겠다는 목표가 생겼죠.”
르챔버의 공동 창업자 임재진 오너 바텐더
막상 호텔이라는 큰 조직을 떠나 자신의 바를 열려 하니, 부족한 점을 보완해 줄 파트너가 필요했다.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임재진 바텐더였다. 2009년 월드 클래스 대회에서 처음 만난 임재진은 엄도환에게 ‘롤모델이자 넘어서야 할 사람’이었다. 그리고 당시 디아지오에서 브랜드 앰버서더로 일하며 바텐더와는 다른 환경에서 바 씬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던 임재진은 그 자리에서 그의 제안을 승낙했고, 그렇게 2014년에 르챔버가 시작된다.
르챔버라는 이름에도 두 사람의 관계가 숨어 있다. ‘Chamber’는 밀실을 뜻한다. 금주법 시대의 스피크이지를 연상시키는 공간 콘셉트와 맞닿아 있는 단어다. 동시에 ‘Le’는 프랑스어 정관사처럼 보이지만, 임재진의 성 Lim과 엄도환의 성 Eom에서 따온 L과 E라는 의미도 가진다. 르챔버는 처음부터 한 사람의 바가 아니라 두 바텐더의 이력과 감각이 합쳐진 공간이었다.
끊임없이 시도하는 공간
엄도환, 임재진이라는 두 월드 클래스 바텐더가 만든 독립 바인 르챔버. 그들에게는 과제가 있었다. 후배들에게 바텐더 출신이 만든 바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수익적인 면도 중요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후배를 양성하고 바텐더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었다. 지금 돌아보니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하니 수익은 자동으로 따라오더라고 엄도환은 말한다. 쉽지 않았지만 한자리를 지켜온 르챔버. 그렇다고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늘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 또한 르챔버를 설명한다. 2016년 임재진 바텐더는 갑자기 피아노를 공간에 들이자는 제안을 한다. 영업이 잘되던 때, 매출을 내는 테이블 하나를 없애는 결정은 모험이었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라이브 피아노 공연은 손님들이 르챔버를 편안한 공간으로 인식하게 하는 장치가 되었다. 그 뒤에도 새로운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 바와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의 칵테일 페어링이 생소하던 2022년에는, 같은 해 문을 연 밍글스와 협업했다. 그 뒤 1년에 한 번씩은 레스토랑들과 협업을 진행하고 있다.
책장 뒤의 공간 경험을 칵테일로 이어가는 ‘Chamber Story’
르챔버를 말하는 세 잔의 칵테일
르챔버는 유러피안을 가미한 재패니즈 클래식 바텐딩을 추구한다. 칵테일들은 클래식 기반이지만 매년 메뉴를 바꾸고, 한국적인 재료, 숙성, 퍼포먼스를 통해 르챔버만의 색을 보여준다. Chamber Story는 이러한 퍼포먼스를 잘 보여주는 르챔버의 시그니처다. 2015년 처음 선보인 이래 꾸준히 사랑받아 온 메뉴이기도 하다. 럼과 열대 과일의 풍미가 어우러진 칵테일을 ‘Le Chamber’ 책 안에 담아 낸다. 책장 뒤에서 시작되는 공간의 경험이 한 잔의 칵테일 안에서도 이어진다. 게스트 바텐딩을 위해 여러 나라를 함께 여행한 메뉴이기도 하다.
한국 재료를 클래식 마티니의 구조로 풀어낸 르챔버의 ‘Ginseng Martini’
Ginseng Martini는 엄도환 바텐더의 외삼촌이 연천에서 직접 재배한 인삼으로 담근 술에서 출발했다. 개인적인 의미와 함께, 한국 재료를 르챔버식 클래식으로 변주하는 방식을 잘 보여주는 메뉴다. 희석식 소주 대신 보드카에 인삼을 넣어 9개월간 숙성한 뒤, 보드카 마티니에 인삼의 향과 질감을 녹여냈다. 처음에는 직원들이 반대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클래식 칵테일의 구조 안에 자연스럽게 한국식 재료를 살려 르챔버의 중요한 로컬 시그니처 중 하나가 되었다.
르챔버의 에이지드 칵테일을 숙성하는 오크 배럴(좌)과 옹기(우)
또 다른 흥미로운 칵테일은 에이지드 칵테일이다. 르챔버는 맨해튼과 네그로니 같은 칵테일을 오크통에 미리 만들어 위스키처럼 숙성시키는 방식을 사용한다. 약 6개월간 숙성하며 테이스팅을 거쳐 완성 시점을 결정한다. 지금까지도 오너 바텐더가 직접 챙기는 몇 안 되는 영역이기도 하다. 처음 4개였던 오크통은 현재 16개로 늘었고, 최근에는 옹기 숙성도 시도하고 있다.
Relation(좌), Laughing Buddha(우)
차별적이고 개별적인 서비스
르챔버의 철학은 결국 서비스로 수렴된다. 엄도환은 좋은 바를 묻는 질문에 “고객이 왔을 때 편안한 바”라고 답한다. 단순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는 그것이 가장 어렵다고 말한다. 손님은 한 잔의 칵테일이나 위스키를 위해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한다. 그때 손님이 느끼는 만족감은 술의 품질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입장부터 착석, 주문, 대화, 추천, 배웅까지 이어지는 모든 과정에서 “내가 대접받고 있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르챔버가 중요하게 여기는 서비스의 기준은 “차별적이고 개별적인 서비스”다.
에이지드 칵테일을 선보이는 엄도환 오너 바텐더
그 기준은 팀 운영에도 이어진다. 엄도환은 바텐더는 세일즈맨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단순히 술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파는 위스키와 칵테일에 대해 정확히 알고, 손님에게 그 가치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식 없이 판매하는 것은 손님에게 정직하지 못한 일이라고 그는 여긴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서비스 교육을 반복하고, 손님 한 명 한 명을 자신의 고객으로 만들라고 말한다. 르챔버가 오랜 시간 충성 고객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처럼 세밀하게 설계된 관계의 방식에 있다.
수많은 오너 바텐더를 배출한 르챔버의 바
다음 세대를 위한 베이스캠프
르챔버는 이제 하나의 바를 넘어 한국 바 씬의 인재가 거쳐 가고 다시 확장되는 베이스캠프에 가깝다. 스스로도 “바텐더 사관학교”라는 표현을 받아들인다. 파인앤코, 티앤프루프 등 르챔버 출신 바텐더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 왔고, 엄도환과 임재진 역시 M+MS와 돈텔마마 등 새로운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엄도환은 한국 바 씬의 미래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한국의 발전 속도는 빠르고, 앞으로 더 다양하고 실험적인 바들이 나올 것이라고 본다. 그 안에서 르챔버가 맡고 싶은 역할은 “큰형님”이다. 앞에서 유행을 좇기보다, 뒤에서 묵묵히 서포트하고, 좋은 인재를 발견해 함께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들어가는 역할이다. 이 말은 르챔버가 왜 12년 넘게 같은 자리에서 존재감을 지켜왔는 지를 설명한다. 책장 뒤의 밀실은 더 이상 숨겨진 장소만은 아니다. 한국 바 씬이 오너 바텐더의 시대로 넘어가던 순간을 기억하는 공간이자, 다음 세대 바텐더들이 자신만의 문을 열 수 있도록 기준을 남긴 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