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촌에 자리한 소울(SOUL)은 양식의 기법과 한국인의 식경험을 바탕으로 ‘현대 한식’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가고 있다. 김희은·윤대현 두 셰프의 결핍과 축적된 경험, 재료에 대한 집요한 탐구와 철학은 요리와 공간, 기물 전반에 녹아들어 이들만의 소울풀한 세계관을 드러낸다.
해방촌의 언덕길은 저녁이 깊어질수록 더 젊어지고 싱그럽다. 다수의 미쉐린 레스토랑들이 주로 청담동에 머물고 있지만, ‘소울(SOUL, 소울 다이닝)’은 해방촌 주택가에 자리를 잡아 단단하게 시간을 쌓아왔다. 북적이는 메인 스트리트에서 한 골목만 벗어나면 소리는 자연스레 잦아들고, 고요 속으로 내려가는 짧은 계단 끝에서 두 사람의 움직임을 만날 수 있다.
김희은 셰프와 윤대현 셰프. 소울의 시작은 장소보다 사람에게서 비롯된 이야기였다. 완벽한 합을 보여주는 주방 뒤편엔, 각기 다른 계절을 지나온 두 사람의 치열했던 시간이 놓여 있다. 그리고 그들이 축적한 모든 것이 모여 지금의 하나된 ‘소울(SOUL)’을 만들었다.
‘소울’이 위치한 해방촌이란 이름처럼, 위로와 영혼이 담긴 두 셰프의 디시는 손님의 마음을 자유롭게 풀어 준다.
일상의 무게를 내려놓고 영혼을 채우는 곳
‘소울(SOUL)’이란 이름은 단순한 브랜딩의 결과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오랜 시간 나눠 온 대화의 기록이자, 연애 시절부터 고민해 온 미식에 대한 결과물이다. 두 셰프는 여러 식당을 다니며 종종 ‘영혼이 부재한’ 순간들을 마주했다. 기계적인 응대, 표정 없는 서비스, 마음이 담기지 않은 접시들. 그리고 씁쓸함을 삼키며 약속했다. “우리는 절대로 저렇게 하지 말자. 무엇을 하든 허투루 하지 말고, 진짜 마음을 담자.” 이러한 다짐은 시간이 흘러 레스토랑의 이름이 됐고, 곧 흔들리지 않는 철학으로 뿌리 내렸다.
도예로 형태를 배웠고, 결핍으로 태도를 다진 김희은 셰프에게 요리는 진심을 전하는 방식이다.
흥미로운 점은 ‘소울’이 품은 중의적인 의미다. 영어로는 ‘영혼’을 뜻하지만, 이곳 ‘해방촌(解放村)’의 지리적 맥락과 만나면 ‘답답한 마음을 풀어 자유롭게 내려놓는다’는 의미로 확장된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공간이 그저 허기를 채우는 식당이 아니라, 손님들의 엉킨 마음을 자유롭게 풀어 주고 해소하는 곳이 되길 바랐던 것이다.
계단을 내려와 자리에 앉는 순간, 도시의 소음은 등 뒤로 멀어지고 하루의 무게는 가벼워진다. 긴장했던 마음의 매듭이 느슨해지는 경험. 이것이 두 셰프가 ‘소울’에서 손님에게 건네고 싶었던 가장 따뜻한 위로이자, 변치 않는 약속이었다.
윤대현 셰프가 거쳐온 경험과 시간, 그리고 깊은 고민들은 셰프로서 재료와 디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되묻게 한다.
두 개의 길이 만나 하나의 선을 만든 순간
처음부터 완벽한 화음을 이룬 건 아니었다. 윤대현 셰프는 양식의 기술과 구조적 프레임에 강했고, 김희은 셰프는 한식의 섬세함과 직관적 감각에 익숙했다. 서로의 언어가 전혀 달랐기에, 초반 1~2년은 각자의 확고함이 부딪히는 치열한 충돌의 시간이었다.
숲을 보는 윤대현 셰프와 나무를 보는 김희은 셰프의 시선. 다름은 충돌을 넘어 ‘소울’의 세계를 더 넓게 확장시킨다.
가장 큰 차이는 시선이었다. 김희은 셰프가 나무 한 그루의 결을 살피며 디테일에 집중하는 사람이라면, 윤대현 셰프는 숲 전체의 균형과 구조를 먼저 설계하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이러한 다름은 서로의 빈틈을 채우는 완벽한 퍼즐 조각이 되었다. 두 사람이 함께 이루는 단단한 뼈대와 섬세한 터치는 길을 잃지 않고 빛을 발했고, 덕분에 요리는 안정감 위에 생기를 입었다. 두 사람은 이 과정을 ‘확장’이라고 이야기했다.
“처음엔 각자의 색이 10개씩 있었어요. 그런데 서로의 색을 섞다 보니 이 둘이 합쳐져 20개가 되는 게 아니라, 컬러의 스펙트럼이 100개, 200개로 무한히 늘어나는 경험을 했죠.” 숲을 보는 눈과 나무를 보는 눈. 서로 다른 두 시선은 충돌을 넘어, 비로소 하나의 선명한 선인 ‘소울’을 그려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계절의 기운과 한국적 정서가 조용히 스며든 ‘소울’의 공간. 이곳에선 요리와 시간이 켜켜이 쌓여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낸다.
재료의 길에서 찾는 한식의 오늘
두 셰프는 미식 업계에서 ‘재료 집착형 열공러 부부’로도 유명하다. 담양 기순도 명인, 장성 김명성 명인을 찾아 장이 익어가는 시간을 지켜 보고, 지역과 가공 방법에 따라 김 한 장의 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배우려 전국의 산지와 생산지를 끝없이 두 발로 누빈다. 좋은 재료를 공급 받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재료가 만들어지는 원리와 생산자의 삶까지 이해하려는 태도가 곧 소울 다이닝의 근간을 이룬다고도 할 수 있다.
홀그레인 머스터드 알갱이를 활용해 캐비어처럼 연출하고 또 식감을 살리면서, 홍시의 감칠맛과 적절한 단맛을 더해 계절의 맛을 표출하는 ‘홍시 설화’
이러한 집요함은 시그니처 메뉴인 ‘미세스 김전복’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김희은 셰프는 이 요리가 사랑 받는 이유를 ‘공감’이란 키워드로 설명했다. 한국인이 전복을 바라보는 기억과 감각을 그대로 접시에 옮기기 위해, 전복을 파도처럼 흐르는 곡선으로 플레이팅하고, 바다의 김을 자연스럽게 곁들였다. 기물 역시 ‘이야기를 담는 액자’라고 생각하며 직접 디테일한 형태를 설계했다.
지난 3년 동안 메인 식재료인 전복과 김의 산지를 계절마다 방문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식재료의 변화에 따라 레시피에도 매번 조금씩 변화를 적용해 온 소울의 시그니처 디시, ‘미세스 김전복’
‘미세스 김전복’은 3년 넘게 끊임없이 업데이트해 온 메뉴다. 산지·크기·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전복의 성질을 매번 비교하고, 김 또한 수십 곳의 산지를 찾아 50여 종이 넘는 김을 직접 맛보며 가장 적합한 조합을 찾아냈다. 손님이 알아채지 못할 만큼 미세한 변화일 때도 많지만, 이들에게 중요한 건 “이 버전이 더 낫다”는 확신이었다. 결국 이 한 접시는 재료를 대하는 태도, 연구에 임하는 자세, 그리고 두 셰프가 지향하는 철학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베스트 디시가 되었다.
‘소울’의 두 부부 셰프에게 더 좋은 재료를 찾아 움직이는 시간은 자신들을 갈고 닦는 오랜 학습의 여정이다.
양식의 기법과 한국인의 식경험이 만나는 지점
소울이 보여주는 ‘한식’은 전통을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이 아니다. 이들에게 한식은 문헌을 보고 흉내내는 과거의 맛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먹고 자란 경험의 총합이며, 이를 현재의 감각으로 풀어낸 것이 곧 ‘현대 한식’이란 믿음에서 시작된다. 윤대현 셰프의 말처럼 소울의 코스는 이러한 의미에서 명백히 ‘한국식’이다.
문헌이 아니라 기억에서 출발한 한식. ‘소울’의 식탁에선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맛을 현재의 감각으로 풀어낸 디시로 만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후식 국수’를 꼽을 수 있다. 일반적인 양식 코스가 파스타–메인–디저트의 흐름을 따른다면, 소울은 이러한 파스타 단계를 ‘후식’의 자리에 배치했다. 윤대현 셰프는 “서양 코스에선 파스타가 앞부분(Primi)에 나오지만, 한국 사람들은 고기를 먹고 나면 자연스럽게 ‘냉면 주세요’라고 하잖아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즉 양식의 생면 파스타 기법을 차용하되, 한국적 식문화인 일종의 ‘선주후면(先酒後麵)’의 감각을 적용한 것이다. 그래서 외국인에겐 다소 낯설지만, 한국인에겐 본능적으로 이해되는 자연스런 코스의 흐름을 이룬다. 이들의 요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양식의 기술과 한국인의 식경험이 조화롭게 만나는 지점에서 완성된다.
도자기의 숨, 계절의 결, 소울의 테이블
소울을 방문한 손님들이 인상 깊게 언급하는 요소 중 하나는 바로 ‘기물’ 이다. 이곳의 접시와 그릇들은 음식을 담는 역할을 넘어, 레스토랑의 정체성과 두 셰프의 요리를 공감하며 이해하는 장치가 된다.
이들에게 플레이팅은 그저 배치가 아니라, 전체적인 형태와 조화를 통해 고객을 설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김희은 셰프의 대학 시절 전공이었던 도예에 대한 감각과 재료 이해도, 그리고 윤대현 셰프의 세심한 구조적 사고가 더해지면서, 소울의 기물은 지속적인 ‘대화’의 과정을 통해 제작된다. 국내외 여러 작가들과 감정적 교류가 오가고 이렇게 깊은 교감에서 비롯된 기물은, 이들이 전개하려는 요리 서사의 첫 페이지가 된다.
흡사 한 폭의 그림 같은 심보근 작가의 ‘무자기’ 접시를 도화지 삼아 담아낸 소울의 ‘도자기’ 디시는 한국의 사계절을 빚고, 그 시절의 이야기를 영롱하게 풀어낸다.
일례로 소울의 도자기 디시는 사계절의 기운을 전한다. 자연의 생기와 활력을 그대로 녹인 예술 작품 같은 그릇의 가장자리 장식, 액자나 병풍을 연상시키는 그릇의 구조 등은 디저트부터 코스 전체의 무드와 흐름을 이끈다. 색동에서 영감을 받은 스테이크 나이프, 한국의 해·산·강을 모티프로 한 로고 접시 등 기물 하나하나가 감정과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작은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릇 위로 음식이 놓일 때, 소울이 만든 세계관은 정점을 찍는다.
올리브 아이스크림에 들기름을 더하고, 트러플 튀일과 캐비어로 마무리해 향과 질감, 염도의 대비를 보여주는 소울의 디저트, ‘흑과 백’
결핍에서 시작된 단단한 뿌리
두 셰프의 에너지는 의외로 결핍에서 비롯됐다. 특히 김희은 셰프에겐 이것이 삶의 원동력이자 스스로를 밀어붙이는 힘이었다. 미술가 집안에서 도예를 전공하던 그녀가 요리를 택했을 때, 아버지에게서 돌아온 것은 응원이 아니라 극심한 반대였다. 네 번의 단호한 거절, 그리고 감정이 격해진 어느 날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간 유리 재떨이. 이 사건은, 그녀가 스스로의 삶을 이끌게 한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집을 나올 때 손에 쥔 건 빨간 돼지 저금통에 모아둔 24만 6,870원. 무보증금 20만 원짜리 방에서 살며, 입지 않고, 먹지 않고, 그 누구도 만나지 않으며 요리 학교에 갈 학비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악착같이 일했다. 그리고 그때의 절박함은 오래도록 그녀를 움직이는 에너지가 되었다.
부부를 넘어, 셰프로서 서로에 대한 존중과 굳은 믿음을 보여주는 두 셰프의 ‘소울’은 섬세하면서도 견고하다.
윤대현 셰프 역시 결핍을 간절함으로 돌파해냈다. 인생 첫 해외 경험이었던 하와이 인턴십에서 숱한 차별과 수모를 겪었는데, 그럼에도 포기 없이 모든 순간을 뉴욕행 티켓을 살 돈을 마련하는 데 매진했다. 손에 든 건 이력서 한 묶음뿐이었지만, 절박함 끝에 단 3일 간 수련할 미쉐린 레스토랑의 스타쥬(stage)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여기서 셰프들이 옥수수알 하나하나를 다듬는 태도를 보며, ‘월드 클래스와 동네 맛집의 차이는 기술이 아니라 태도’란 사실을 뼛속 깊이 깨달았다. 그날 이후 그는 어떤 작은 재료도 허투루 손대지 않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결핍을 극복해낸 절박함과 노력, 경험은 윤대현, 김희은 셰프의 디시에 깊이를 더해 준다.
두 사람이 이겨낸 결핍과 살아낸 경험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내면에 뿌리 깊이 새겨졌고, 부부 셰프로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흔들리지 않는 기둥이 되었다. “다시 바닥으로 돌아가도, 우리는 결국 일어날 거예요”란 말에서 서로를 믿고 의지해 온 지난날의 깊이가 느껴졌다.
“제가 셰프로서 조금이라도 인정을 받으면 아빠를 초대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아빠는 제 요리를 한 번도 드셔 보시지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가끔 이렇게 생각해요. 오늘 나가는 이 접시는 하늘에 있는 아빠에게 보내는 마음이다.” 이 말과 함께 울컥하는 김 셰프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윤 셰프의 모습을 보면서, ‘소울’이란 이름에 담긴 진심이 더욱 분명하게 와 닿았다.
오픈 키친 형태인 ‘소울’의 바 테이블. 디시가 키친에서 테이블로 전해지기까지 두 셰프의 정성 어린 손길을 생생히 경험할 수 있다.
누군가의 어깨 그리고 발판이 되어 주는 것
‘소울’은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외에도 비스트로 ‘에그앤플라워’, 한식 곰탕 전문점인 ‘신흥 백곰탕’을 운영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이 둘은 그저 ‘사업 확장’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두 셰프의 마음속엔 전혀 다른 의미가 잠재돼 있다. 실제로 이러한 공간들은 다이닝 후배들에게 더 많은 길을 열어주려 한 무대 확장에 가깝다.
테이블 위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소울’의 기물은 레스토랑의 철학, 한식과 한국 문화에 대한 존중을 또렷이 드러낸다.
두 사람은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어깨’를 밟고 올라왔다고 말한다. 주방의 언어를 알려 준 선배들, 실수를 감싸 준 헤드 셰프들, 인턴 시절 작은 가능성을 먼저 봐 준 지도자들. 이것들이 쌓여 ‘소울’이 만들어졌듯, 이젠 자신들이 ‘넥스트 셰프’를 위해 선배 역할을 해야 한다고 느낀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현역으로만 뛸 순 없잖아요. 후배들이 더 크고 넓은 꿈을 꿀 수 있도록 발판을 만들어 주고 싶어요.”
부산 ‘램지’와의 협업에서 선보인 윤대현 셰프의 ‘갈치’ 디시. 그는 다양한 레스토랑과의 콜라보를 통해 셰프로서의 태도를 다시 배우게 됐다고 말했다.
이러한 이들의 철학은 국내외로 이어지는 컬래버레이션에서도 드러난다. 부산 ‘램지’와의 협업에서 새롭게 선보인 생선 디시를 비롯해 각종 메뉴는 해외 팝업, 타 레스토랑과의 협업, 다른 주방과의 교류를 통해 매번 새로운 해석을 거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두 셰프를 위한 ‘요리의 발전’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받은 배움을 다시 흘려 보내는 또 다른 전수 방식이다. 후배 셰프들이 더 다양한 환경에서 시도하고 실패해 보며 성장할 수 있도록 더 넓은 무대를 만들어주는 일. 바로 이것이 두 셰프가 말하는 ‘후회가 덜 남는 삶’의 한 축이다.
결국 ‘소울’이 지향하는 미래는 거창하지 않다. “후회가 덜 남는 선택을 하는 오늘을 보내자”란 다짐. 그리고 이것을 매일 실천하는 것. 이러한 마음이 쌓여 언젠간 후배들에게 단단한 발판이 되길 바라는 것. 이렇게 소울의 다음 챕터는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확장되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