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프렌치의 경쾌한 진화 ‘레스쁘아(L’ESPOIR)’

정통 프렌치 퀴진의 구조와 철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온 임기학 셰프의 ‘레스쁘아’는 최근 시즌 3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흔들림 없는 원칙, 샤퀴테리 장인 정신, 그리고 제철 재료에 대한 떼루아적 접근 방식을 바탕으로 동시대 파리지앵의 감각을 담은 ‘브람스 같은 요리’를 선보이고 있다.

서울 청담동, 쏟아지는 햇살이 유난히 투명하게 내려앉는 곳에 ‘레스쁘아(L’ESPOIR)’의 간판이 걸려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하얀 테이블보 위에 부서지면서 ‘밝음(Bright)’의 미학이 공간을 채운다. 

임기학 셰프가 지휘하는 레스쁘아는 새로운 공간에서 세 번째 챕터를 맞이했다. 지난 18년, 햇수로 20년을 향해 가는 동안 한국 프렌치 퀴진의 최전선에서 ‘클래식’이란 깃발을 놓지 않았던 그는 이제 어둠 속의 부엉이(Hibou)가 아닌 빛 속의 지휘자로 변모했다. 화려한 파인 다이닝과 국적 불명의 퓨전 요리가 유행처럼 번지고 사라지는 서울에서, 그는 묵묵히 정통의 무게를 견디며 프렌치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청담동으로 자리를 옮긴 레스쁘아는 이전에 비해 더 밝고 경쾌한 무드를 지닌 공간으로 변화했다.

성악도, 악보를 덮고 시간의 맛을 지휘하다

그의 이력은 한 편의 예술 영화를 닮았다. 그는 본래 서울예고를 거쳐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음악도였다. 클래식 음악 무대 대신 주방의 지휘자가 된 데엔 가족의 영향이 컸다.

“어릴 때부터 집안 분위기가 먹는 것에 진심이었습니다. 할아버지, 부모님 모두 요식업에 종사하셨기에 제게 식당은 그저 밥집이 아니라 놀이터이자 꿈의 공간이었죠. 성악을 전공했지만 마음 한구석엔 늘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있었어요. 더 늦기 전에 진짜 내 무대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었죠.”

요리의 길을 택하자 부모님의 반대는 생각보다 거셌다. 식당 일이 얼마나 고된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기에 만류한 것이었다. 임 셰프의 형은 미국 코넬대 호텔경영학과에 합격하고도 부모님의 반대로 진학하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요리 학교로 떠났고, 수석에 가까운 성적으로 존슨앤드웨일즈 대학교(Johnson & Wales University)를 졸업하며 자신의 선택을 또렷이 증명해 보였다. 

그의 집요한 근성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뉴욕의 전설적인 셰프 다니엘 불뤼(Daniel Boulud)의 레스토랑 ‘다니엘(Daniel)’에 들어가고 싶었던 그는 무작정 이력서를 내고 주말마다 왕복 6시간 거리를 오가며, 다니엘 불뤼 계열의 ‘DB 비스트로’에 보수도 없는 스타쥬(Stage)를 자청했다. 

임기학 셰프는 전공이었던 음악으로 클래식 무대에 오르는 대신, 18년째 클래식 프렌치 퀴진을 지휘하고 있다.

졸업이 임박했음에도 채용 확답을 받지 못하던 중 어느 날 총괄 셰프인 올리비에 뮐러(Olivier Muller)가 그를 부르더니, DB 비스트로에서 가장 인상적인 메뉴가 무엇이었는지 물었다. 행여 지금 당장 만들어 보라고 시킬까봐 겁이 났던 그는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고 즉석에서 만들어 낼 수 없는 메뉴를 꼽았다. 그러자 올리비에 셰프는 바로 이 요리를 한 그릇 내어주며 말했다. “먹어라. 그리고 환영한다. 넌 이제 DB 패밀리다!” 임기학의 요리 인생 서막을 알리는 한마디였다.

그렇게 시작된 뉴욕 생활은 전쟁이었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하고 서서 밥을 먹으며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갔다. 그리고 당시 치열했던 이 시간들은 훗날 그가 한국에서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프렌치를 구축하는 단단한 뼈대가 됐다.

‘부시리와 당근 무슬린을 말아낸 룰라드, 카비아리의 캐비아(Roulade de Boushiri, Moussline de Carotte, Kaviari Caviar)’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이 메인 디시는 색감부터 맛까지 우아한 감각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박물관의 클래식이 아닌, 현재의 파리를 담다

2008년, 그가 서울에 레스쁘아를 처음 열었을 때 목표는 선명했다. ‘프랑스 요리의 원형(Archetype)을 보여주자’, 그것은 일종의 사명감이자 투쟁이었다. 부야베스를 끓일 땐 프로방스 지방에서 쓰는 생선과 같은 걸 골라 썼고 소스와 앙트레, 메인까지 클래식 프렌치 레시피를 충실히 구현하려 애썼다. ‘진짜 프랑스 맛’이 무엇인지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이자 강박에 가까운 집착이었다.

당근과 토마토, 라임, 까라비네로 새우가 어우러진 ‘까라비네로(Carabinero)’, 마와 사과, 더덕 에스푸마로 만든 ‘월도프(Waldorf)’, 토란과 뿌리 채소의 향긋한 조합이 인상적인 ‘타로 루트(Taro Root)’, 트러플 둑셀과 감자의 조화가 돋보이는 ‘트러플(Truffle)’까지, 레스쁘아를 대표하는 아뮤즈 부슈 4종이다.

“예전엔 옛날 방식, 무거운 소스에 정말 집착했었어요. 그게 ‘진짜’라고 믿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프랑스에 가보면 아무도 그렇게 요리하지 않아요. 미쉘 게라흐(Michel Guérard) 같은 누벨 퀴진(Nouvelle Cuisine)의 선구자들도 이미 1970년대부터 ‘더 가볍게, 더 밝게’를 외쳤거든요. 지금 제가 보여주고 싶은 건 박물관의 요리가 아닙니다. 동시대 파리지앵이 즐기는, 조금 더 밝고 경쾌해진 ‘현재의 클래식’입니다.”

요리도 음악처럼 : 모차르트를 지나 브람스로

성악을 전공했던 셰프답게 그는 자신의 요리 여정을 클래식 작곡가들에 비유했다. “처음 레스쁘아를 열었을 땐 모차르트 같았어요. 형식이 딱 떨어지고, 교과서적이고, 명쾌했죠. 군더더기 없는 원형 자체를 보여주려 했었으니까요. 그러다 중간엔 베토벤처럼 되고 싶었어요. 웅장하고, 심각하고, 뭔가 힘이 잔뜩 들어간 요리들 있잖아요? 남들에게 좀 더 멋있어 보이고, 압도하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죠.”

‘오렌지 글레이즈가 더해진 엔다이브와 꽃게 리물라드(Endive Tiède, Rémoulade de Crabe)’ 디시는 식사의 산뜻한 오프닝을 장식한다.

그렇다면 시즌 3를 맞은 레스쁘아에서 임 셰프는 어떤 음악을 연주하고 있을까. “지금은 브람스 같아요. 화성은 훨씬 복잡해졌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더 유려하고 내면의 깊이가 있는 음악이랄까? 겉보기에 화려하게 치장하거나 쇼맨십을 부리지 않아도, 한 입 먹었을 때 묵직한 울림이 있는 요리. 다양한 변주가 녹아 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그런 ‘브람스 같은 요리’를 하고 싶습니다.”

떼루아(Terroir)와 구조(Structure) : 타협하지 않는 가치

임 셰프가 생각하는 프랑스 요리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는 단호하게 구조를 꼽았다. “프렌치의 강점이자 핵심은 오랫동안 답습되어 온 견고하고 탄탄한 ‘뼈대’라고 생각합니다. 한식이 밥과 국, 반찬이라는 고유의 구성을 잃으면 더 이상 한식이 아니듯, 프랑스 요리 역시 그들만의 조리법과 코스의 흐름, 소스의 문법이라는 엄격한 구조를 지킬 때 프렌치 퀴진으로서의 의미가 비로소 성립됩니다. 이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고 겉모습만 흉내내거나 무작정 섞는 건 ‘무국적 요리’일 뿐이죠.”

임기학 셰프의 레스쁘아엔 크룩(KRUG) 대표 샴페인뿐 아니라, 감도 깊은 와인 리스트를 다채롭게 만날 수 있다.

이러한 철학은 그가 한국의 식재료를 대하는 태도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한국 땅에서 난 제철 재료를 사용하는 것을 두고 ‘한국적 터치’나 ‘퓨전’이라 불리는 것을 거부한다.

“한때 한식의 세계화 열풍이 불었을 때, 한 공무원이 찾아와 메뉴에 한식 요소를 넣으라고 강요한 적이 있었는데 전 ‘한식의 세계화엔 관심이 없고 프랑스 음식의 한국화에 관심이 있다’고 했었죠. 프랑스 요리의 문법을 완벽하게 구사한다면,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한국 땅의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떼루아(Terroir)’를 중시 여기는 가장 프랑스적인 태도라고 봅니다.”

레스쁘아는 우리나라 최초 크룩(KRUG) 앰버서더 레스토랑인 만큼, 크룩 샴페인과 페어링하기 좋은 클래식 프렌치의 정수가 담긴 요리를 향유하기 훌륭한 곳이다.

샤퀴테리, ‘무슈 꼬숑’과의 완벽한 동거

본인이 고수한 신념이 아니면 타협하지 않는 그의 철학은 샤퀴테리에 대한 집착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1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은 샤퀴테리의 불모지였다. 이때 그가 이 세계에 뛰어든 계기는 꽤나 단순했다. 

“프랑스 남서부 요리인 ‘까슐레(Cassoulet)’를 만들고 싶은데 거기에 꼭 필요한 ‘툴루즈식 소시지’를 구할 수가 없는 거예요. 마트에서 파는 공장식 소시지를 넣을 수는 없어서 한 번 제대로 배워 보자고 생각했었죠.”

샤퀴테리를 비롯해 모든 식재료에 진심인 임기학 셰프의 손끝에선 오늘의 프렌치가 매일 새롭게 태어난다.

결국 그는 뉴욕의 FCI(French Culinary Institute, 현 ICC)에서 3주 동안 진행되는 샤퀴테리 단기 코스에 등록하고는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뉴욕에 간 김에 스승인 올리비에 셰프를 찾아가 샤퀴테리를 배우러 학교에 등록했다고 이야기하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새벽 5시에 가 보라며 어떤 주소가 적힌 쪽지를 건넸다. 찾아간 곳은 거대한 ‘샤퀴테리 전문 키친’으로 프랑스의 전설적인 샤퀴티에 ‘질 베호(Gilles Vérot)’와 협업하는 곳이었다. 

시즌 3를 맞이한 레스쁘아 1층에선 임기학 셰프의 한층 더 밝아진 요리를, 2층에선 ‘무슈 꼬숑’의 샤퀴테리와 와인을 캐주얼하게 즐길 수 있다. 

임 셰프는 학교 대신 키친으로 찾아가 차가운 작업대 위에서 하루 종일 고기 핏물을 빼고, 지방을 갈아내고, 속을 채우며 각종 기술을 익혔다. 이렇게 임 셰프의 샤퀴테리 브랜드 ‘무슈 꼬숑’과 ‘레스쁘아’의 완벽한 샤퀴테리 플레이트는 그의 집요함이 빚어낸 최고의 산물이다. 무엇보다 이번 ‘레스쁘아 시즌 3’의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무슈 꼬숑’이 레스쁘아 2층으로 들어왔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2층에 별도로 마련된 샤퀴테리 주방에서 직접 만든 무슈 꼬숑 샤퀴테리를 와인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위기의 프렌치? “기본을 건너뛴 성장이 문제”

요즘 다이닝 업계에서는 ‘프렌치의 위기’란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젊은 층은 더 새롭고 자극적인 경험을 좇고, 정통 클래식은 때때로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임 셰프의 진단은 달랐다. 그는 이를 위기가 아닌 ‘기형적 성장’의 부작용으로 보았다.

대한민국 서울에서 프렌치 퀴진을 정착시키고, 이를 유연하게 요리해오며 지킨 임기학 셰프의 가슴속엔 꺼지지 않는 불꽃이 살아 숨쉰다. 

“문화의 성장이 너무 빨라서 1, 3, 5, 7, 9를 건너뛰고 바로 10으로 가는 느낌이에요. 클래식에 대한 존중과 이해 없이 모던함만 추구하면 사상누각이 됩니다. 피카소가 입체파 그림을 그리기 전에 데생의 천재였던 것처럼, 요리사라면 뼈대가 되는 ‘클래식’을 먼저 몸에 익혀야 합니다. 기초 없이 유행만 좇는 요리는 2~3년은 버틸지 몰라도, 절대 10년을 갈 수는 없어요.”

그는 자신이 할 일이 유행에 휩쓸리거나 트렌드를 좇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클래식의 가치를 지키며 중심을 잡는 것이라 믿는다. 누군가는 옛것을 지켜야,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이들도 기준점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임기학 셰프는 유행에 휩쓸리는 요리보다 탄탄한 프렌치 클래식의 기둥 위에 동시대의 분위기를 담아내는 미학을 추구한다. 

그래서 20년 가까이 주방에서 분투하며 그가 깨달은 가장 중요한 오너 셰프의 덕목은 ‘교육’이다. “완벽하게 훈련된 프로를 돈으로 데려오는 건 큰 기업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결국 오너 셰프의 역할은 원석을 데려다 프로로 만들어내는 교육에 있어요. 홀이든 주방이든, 아무것도 모르던 친구가 제 밑에서 성장해 어엿한 셰프가 되고, 소믈리에가 되어 나가는 모습을 볼 때면 정말 큰 보람을 느낍니다. 그게 이 업계의 발전에 기여하는 길이기도 하고요.”

기억되기 위해 요리하는 셰프

그에게 앞으로 어떤 셰프로 남고 싶은지 묻자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요리하지 않고 기억되기 위해 요리하고 싶다”고 답했다.

프랑스 음식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려 한 임기학 셰프의 디시들. 이전의 레스쁘아 메뉴보다 좀 더 가볍고, 떼루아와 계절감, 식감과 맛의 밸런스를 고려해 다양한 소스를 활용했다.

“예전에 부모님 손을 잡고 왔던 꼬마 손님이 어엿한 성인이 되어 “셰프님, 저 결혼해요!”라며 청첩장을 들고 찾아올 때 보람을 느껴요. 누군가의 인생 한 페이지에서 제 음식이 그리고 이 공간이 기억으로 남는다는 것, 그것보다 더 값진 게 있을까요?”

유행은 변해도 클래식은 영원하다. 청담동의 새로운 공간에서, 더욱 밝고 견고해진 임기학의 요리가 이제 다시 한 번 제1막을 올렸다. 

모차르트의 명쾌함을 지나 베토벤의 고뇌를 넘어, 깊고 유려한 브람스를 연주하고 있는 임기학 셰프. 이제 그의 지휘로 레스쁘아를 찾는 미식가들에게 가장 완벽한 프랑스의 맛을 들려 줄 차례다.

단락

Writer 장준우(Jun-woo Jang) 셰프
Editor 전채련(Chaeryeon June)
Photographer 오충근(Choong-keun Oh)_ studio. choongk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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