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보다 위대한 '마음의 온도' : 쵸이닷 조내진 총괄 소믈리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찰나의 순간,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다정한 환대. 톡톡 튀는 위트와 파격이 돋보이는 최현석 셰프의 주방을 든든하게 지탱하며, 손님의 마음을 따뜻한 온도로 유연하게 만들어 내는 사람. 무대 뒤에서는 지독할 만큼 치열하게 레스토랑의 생존을 책임지고, 테이블 앞에서는 한없이 따스한 온기로 진심을 전하는 쵸이닷의 조내진 총괄 소믈리에 이야기.

파인다이닝의 홀은 한 편의 잘 짜인 연극 무대와 같다.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테이블 사이로, 수트를 입은 소믈리에는 물 흐르듯 유려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우아한 막이 내리고 조명이 꺼진 무대 뒤편, 그곳의 매일은 생존을 건 치열한 현실이다.

올해로 업력 20년 차. 조내진 소믈리에는 열에 아홉이 문을 닫는다는 냉혹한 F&B 생태계에서 살아남아, 최현석 셰프의 파인다이닝 '쵸이닷(CHOI.)'을 10년째 지키고 있는 총괄 지배인이다. 프랑스 샴페인 하우스 '도츠(Deutz)'의 앰버서더이자 보르도 기사 작위를 받은 최정상급 와인 전문가. 그러나 그는 방대한 와인의 지식보다, 빗속을 뚫고 들어온 손님의 젖은 어깨를 먼저 살피는 '서비스맨'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최고의 미식 무대에서, 그는 어떻게 한국 다이닝 씬에서 가장 긴 생명력을 가진 소믈리에가 될 수 있었을까. 조내진 소믈리에가 빈틈없이 써 내려온 20년의 테이스팅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초이닷 조내진 총괄 소믈리에

 

한 잔의 기쁨, 평생을 쏟아도 모를 세계

조내진 소믈리에의 시작은 화려한 유학파의 서사와는 거리가 멀다. 중학교 시절부터 어머니의 식당 서빙과 배달을 도운 그는 '누군가에게 음식을 전하고 다가가는 일'의 즐거움을 땀으로 익힌 부산 소년이었다.

대학에서 요리를 전공했지만 흥미를 잃어가던 그에게, 교양 수업에서 마주한 '모스카토' 한 잔은 기분 좋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무겁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와인의 문턱이 경쾌하게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와인을 테이스팅하며, 그는 다른 어떤 술도 대신할 수 없는 와인만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묵직한 포만감, 그리고 잔 안에서 끝없이 피어오르는 수많은 향은 경이로움과 환상 그 자체였습니다. 와인은 단순히 '맛있는 술'로 끝나지 않더군요. 와인 한 잔을 두고 그 속에 담긴 역사와 분위기를 하루 종일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와인의 세계는 끝이 없습니다. 같은 와인도 빈티지마다 얼굴이 달라지니 평생을 공부해도 다 알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저를 벅차게 했습니다. 이 기쁨을 오시는 손님들에게 온전히 전하고 싶어 끝없는 탐구를 결심했죠."

와인을 제대로 배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24살의 그는 무작정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3개의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고시원 생활을 버텨야 했지만, 쉬는 날이면 한국에서 취득할 수 있는 모든 와인 자격증에 매달리며 묵묵히 내공을 다졌다. 이후 청담동의 대형 레스토랑 '루카511'과 에드워드 권 셰프의 '랩24'를 거치며 하이엔드 다이닝이 요구하는 집요한 디테일을 온 몸으로 흡수했다. 하지만 F&B 시장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경제적 어려움에 흔들리던 32살의 그에게 운명 같은 연락이 닿았다. 바로 최현석 셰프의 '엘본 더 테이블'이었다.

 

조내진 소믈리에의 리딩 하에 초이닷의 홀 서비스가 이루어진다.

 

최현석 셰프와 10년이 넘는 동행 : 'YES'가 쌓아 올린 신뢰

'엘본 더 테이블'에 소믈리에로 합류한 그는 매니저 업무까지 도맡아 조직의 뼈대를 단단하게 세웠다. 1년 반 뒤,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던 최현석 셰프는 누구보다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2017년 3월 18일, 그렇게 조내진 소믈리에는 '쵸이닷(CHOI.)'으로 다시금 새로운 출발선에 서게 된다.

개성 강한 셰프와 홀을 책임지는 소믈리에가 이토록 긴 세월을 파열음 없이 함께 동행하는 것은 국내 업계에서도 드문 일이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조내진 소믈리에는 무엇보다 '경청과 신뢰'를 우선적으로 꼽았다.

"쵸이닷을 오픈하고 처음 3년 동안은 셰프님이 하고자 하시는 모든 비전에 무조건 'YES'를 외쳤습니다. 셰프님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며, 그 방향대로 직원들을 설득하고 이끌었죠. 만약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셰프님 스스로 느끼고 이해하실 거라 믿었습니다. 그렇게 4년의 시간이 흐르자, 셰프님도 저를 온전히 믿어주셨고 이후 홀과 서비스에 관해 제가 주도적으로 의견을 내고 전담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가 최현석 셰프를 굳게 믿는 또 다른 이유는 변치 않는 한결같음이다. 늦은 밤까지 흐트러짐 없이 주방을 지키고 일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향하는 셰프의 일관된 일상은, 레스토랑 전체의 흔들림 없는 평온함으로 이어진다. 그 견고한 신뢰는 이제 바다를 건넌다. 내년 봄, 뉴욕 30번가에 서울과 동일한 콘셉트의 '쵸이닷 뉴욕'이 문을 연다. 10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 올린 브랜드가 마침내 세계의 중심을 향해 발을 내딛는 것이다.

 

와인을 서빙 중인 초이닷 조내진 총괄 소믈리에 

 

단단한 터전과 지속 가능성, 소믈리에의 생명력을 지키려는 노력

조내진 소믈리에의 따뜻한 미소 이면에는 날카롭고 끈기 넘치는 승부사의 기질이 숨겨져 있다. 쵸이닷을 오픈한 34살 무렵, 그는 2년 반 동안 단 이틀을 쉬며 레스토랑 곁에 원룸을 얻고 5분 대기조처럼 매장을 지켰다. 목표는 명확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생존하고, 매니저로서 가장 성공한 고액 연봉자가 되는 것'.

"열에 아홉이 문을 닫고 1년 뒤 사라지는 게 한국 F&B의 현실입니다. 주변의 소믈리에들이 지쳐서 이직을 반복하는 걸 무수히 봤죠.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내가 총괄하는 레스토랑만큼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직원들의 든든한 삶의 터전으로 지켜내겠다고요."

 

다양한 행사와 이벤트를 기획하며, 서비스업의 역할을 확장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조내진 소믈리에

그는 서비스직의 열악한 급여 한계를 스스로 깨부수고자 했다. 단순히 와인만 서브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외부 영업을 펼쳐 수없이 많은 명품 브랜드의 하이엔드 케이터링을 유치했다. 이는 레스토랑의 전체 볼륨을 키우는 자양분이 됐다. 결국 레스토랑 매출만큼 케이터링 매출이 잡히기 시작했고, 그의 연봉 역시 업계 최고 수준으로 뛰었다.

"제가 이 씬에서 고액 연봉을 받아야, 이 업계에 뛰어드는 훌륭한 후배들이 늘어날 거라 생각했습니다. 원하는 와인 하나 마음 편히 발주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어떻게 소믈리에가 역량을 키우겠습니까. 제가 영업적인 부분에 힘을 써줄 테니, 후배들에게는 오직 와인을 공부하고 고객을 섬기며 하고 싶은 걸 다 해보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소믈리에로서 자생력을 키울 수 있으니까요."

이러한 신념은 5년 전, 조선 팰리스 총괄 소믈리에인 김성국, 레스토랑 산의 주재민 소믈리에와 함께 결성한 와인 크루 '쏨즈(Somz)'로 확장되었다. 한국 소믈리에들의 생명력을 길게 이어가기 위해 뭉친 이들은, 현재 27개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의 소믈리에들이 모인 거대한 구심점이 되었다. 현재까지 총 48회의 세미나를 열었고, 마스터 소믈리에 초청 강의부터 사회 공헌, 국제기구와의 MOU 기부 활동 등을 통해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소믈리에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조내진 소믈리에가 회장으로 있는 쏨즈는 국제어린이양육기구인 한국 컴패션과 파트너십을 체결하기도 했다.
쏨즈는 마스터 소믈리에 초청 강의부터 사회 공헌, 국제기구와의 MOU 기부 활동 등을 통해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소믈리에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나를 위로한 샴페인의 생동감, 그리고 어떤 와인보다 중요한 '마음의 온도'

인스타그램 아이디가 '@cham.prince'일 정도로 샴페인을 향한 그의 사랑은 남다르다. 하지만 그가 샴페인에 이토록 깊이 빠져든 이유는 다이닝의 화려함이 아닌, 치열하고 고단한 일상 때문이었다.

"하루 12시간씩 일하고 마감을 끝낸 늦은 밤, 소주 한 잔을 들이켜는데 문득 스스로가 초라해지더군요. '나는 고객에게 멋진 감동을 주는 사람인데, 내 퇴근길은 왜 이럴까.' 그래서 큰맘 먹고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는데, 그 버블이 주는 생동감이 지쳐있던 저를 번쩍 깨우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부터 와인 강의를 통해 모은 돈으로 샴페인을 즐기며 다시금 일어설 에너지를 얻었죠."

 

샴페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자랑하는 조내진 총괄 소믈리에

6년 전부터 매년 샴페인의 고향인 프랑스 상파뉴를 방문해 감각을 갈고 닦는 그는 쵸이닷에서도 샴페인의 활용도를 극대화한다. 모든 페어링을 샴페인으로 채우는가 하면, 고추장 아이스크림처럼 최현석 셰프의 위트 있고 개성 강한 요리에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와인을 과감하게 매칭한다. 하지만 그가 와인에 관한 지식보다 최우선으로 삼는 절대 원칙이 있다. 바로 고객의 '마음의 온도'를 맞추는 일이다.

"직원들에게 늘 강조합니다. 고객의 마음 온도를 올리는 게 진짜 소믈리에의 역할이고 와인은 그 다음이라고요. 빗길에 온 손님이라면 주문을 받기 전에 심호흡을 하고 옷매무새를 다듬을 수 있는 시간을 배려해야 합니다. 꽃을 든 손님에겐 '좋은 날이신가 보네요'라는 다정한 한마디를 건네는 거죠. 식사 전 고객의 마음 온도를 100도로 끌어올려 놓으면, 그 뒤엔 어떤 와인을 건네도 맛있게 느끼십니다. 완벽한 마리아주는 결국 고객의 기분 좋은 온도에서 완성되는 거니까요."

 

초이닷 조내진 총괄 소믈리에

 

후배들을 위한 학교 설립부터 백발의 소믈리에까지, 끝나지 않을 여정

"저는 '친절한 소믈리에'보다 '따뜻한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 억지로 꾸며낸 친절이 아니라, 20년 혹은 30년의 치열했던 삶의 궤적에서 자연스레 묻어나는 여유. 그 흔적들이 차곡차곡 쌓였을 때 비로소 우러나오는 것이 진짜 따뜻함이니까요."

한국 다이닝 씬에서 유례없이 20년의 생명력을 증명해 낸 조내진 소믈리에. 쉴 새 없이 현장을 누벼온 그의 시선은 이미 다음 챕터를 향해 뻗어 있다.

"50살이 되면 실전 서비스 학교를 세우고 싶습니다. 교과서에 갇힌 이론이 아니라, 현장에서 치열하게 부딪히며 깨우친 서비스의 본질과 태도를 가르치는 곳이죠. 인공지능이나 로봇은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의 온기를 지닌 진짜 인력을 길러내고 싶습니다. 그리고 70세가 되면 오사카 와인바의 카와스미 코지 소믈리에처럼, 백발이 된 제가 온전히 혼자 운영하는 작은 레스토랑을 열고 싶습니다. 일흔이라고 소믈리에를 하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요?"

와인 캡슐을 벗겨내는 데만 30분이 걸려 쩔쩔맸던 스물넷의 부산 청년은, 어느덧 한국의 와인씬을 이끌며 후배들의 단단한 길잡이가 되어 뉴욕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쵸이닷을 나서는 길, 그 어떤 화려한 와인보다 짙고 묵직하게 남은 것은 사람을 향한 그의 치열하고도 따뜻한 온도였다.

 

단락

Writer 김성현 (James Kim)
Editor 이정윤 (Julia Lee)
Photographer 김성현 (James Kim), 조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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