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서는 완벽을 조율하는 지휘자로, 무대 뒤에서는 팀원을 품는 서포터로 매일 다이닝의 마법을 연출하는 최은혜 소믈리에의 이야기
레스토랑이라는 무대 위, 최은혜 소믈리에는 와인을 통해 식사의 전체 흐름을 지휘하는 '지휘자'다. 때로는 섬세한 터치로, 때로는 과감하고 공격적인 변주로 공간의 분위기를 이끌며 손님의 경험을 입체적으로 완성해 낸다. 그리고 화려한 무대 뒤편의 백스테이지로 돌아오면, 그는 팀원들이 각자의 고유한 개성을 마음껏 뽐낼 수 있도록 묵묵히 전체를 조망하고 지원하는 '서포터'로 변모한다.
'라망시크레'의 최은혜 지배인 겸 소믈리에
2018년 '라망시크레'의 치열했던 오픈 준비 과정부터 합류하여 지금까지 6년 연속 미쉐린 스타를 굳건히 지켜내며 레스토랑의 눈부신 성장을 이끌어 온 최은혜 지배인 겸 소믈리에. 과거 남성 중심적이었던 주류 업계의 견고한 편견을 깨고, 아시아 파인다이닝 씬을 대표하는 여성 리더로 우뚝 서기까지 그가 걸어온 길은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와인 한 잔에 담긴 찰나의 인연으로 시작해 호텔 식음 총괄이라는 거대한 비전을 꿈꾸기까지, 그의 단단한 서비스 철학과 빛나는 무대 이면의 치열한 이야기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았다.
우연이 운명이 된 순간, 한 잔의 샴페인이 열어준 경이로운 세계
최은혜 소믈리에가 외식업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은 24살 무렵이었다. 당시 압구정동에 위치한 이탈리안 레스토랑 '노아'가 그의 첫 무대였다. 백지상태와 다름없던 주니어 시절, 그에게 와인은 그저 수많은 주류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은 아주 우연히 찾아왔다. 당시 레스토랑을 찾은 한 손님이 고생하는 그에게 격려의 의미로 건넨 '크루그' 1990 빈티지 샴페인 한 잔이 그 주인공이었다. 와인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잔에서 피어오르는 압도적인 향과 복합적인 맛은 그를 단숨에 매료시켰고, 와인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끓어올랐다.
평소 술을 잘 마시는 편이 아니었지만 그는 와인이 가진 본질적인 마력에 집중했다. 최은혜 소믈리에는 와인에서 단순한 미각적 즐거움을 넘어, 한 잔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공간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장악하는 힘을 느꼈다. 와인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소통이 이어지는 과정에 매력을 느낀 그는 본격적으로 소믈리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대 중후반, 동료 소믈리에들과 매달 명확한 주제나 키워드를 정해 정기적인 블라인드 테이스팅 스터디를 진행했다. 편견을 배제한 채 와인의 본질을 탐구하고, 핸들링 방식과 온도에 따라 천차만별로 변하는 와인을 온몸으로 느끼며 와인에 더욱 빠져들었다.
현장의 언어를 배우다
'노아'에서 3년여간의 경험을 뒤로하고, 그는 와인샵 '카비스트'로 자리를 옮기며 비즈니스적 감각을 쌓기 시작했다. 샤토 라피트 로칠드 한국 지사장이 운영하던 그곳에서 그는 와인을 소비하는 타깃 고객층을 세밀하게 구분하는 법, 직수입 와인의 디테일한 특성 등 애호가들의 심리를 읽어내는 능력을 길렀다. 이후 리테일 샵과 바(Bar)가 결합된 형태의 '한남리커'에 합류하며 그의 역량은 만개하기 시작했다.
한 잔의 균형을 위해 온 감각을 집중하는 순간.
당시 사수였던 김민주 소믈리에의 제안으로 합류한 그곳에서, 그는 선배들의 어깨너머로 배우던 입장에서 벗어나 직접 고객의 테이블을 책임지는 플레이어로 나서기 시작했다. 주니어 소믈리에로서 고가의 와인을 온전히 핸들링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다. 그러나 고객의 니즈를 정확히 캐치한 그의 서비스는 열광적인 피드백으로 돌아왔고, 이 경험은 그가 스스로를 온전한 '소믈리에'로 정의하고 흔들림 없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편견과 한계를 넘어선 여성 리더십의 증명
13년 전 그가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소믈리에는 중후한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수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와인 박스를 운반하고,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장시간 서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다이닝 현장은 여성에게 육체적으로 어려운 환경이라는 편견이 지배적이었다. 게다가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는 그의 체질은 다채로운 테이스팅 경험을 축적해야 하는 소믈리에로서 핸디캡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계 앞에서 망설이는 대신, 자신만의 고유한 강점에 집중했다. 좋은 와인을 자주 접하기 어려웠던 주니어 시절, 그는 역으로 고객과의 소통에 사활을 걸었다. 고객의 미세한 취향과 성향을 날카롭게 파악하여 최적의 와인을 추천하고 성공적인 업셀링을 이끌어냈다. 그 결과 고객과 함께 훌륭한 와인을 테이스팅하며 경험치를 쌓을 수 있는 기회는 자연스레 늘어났다. 한계를 기회로 치환한 그의 스마트한 사고방식과 전략은, 훗날 라망시크레를 이끄는 유연하고 단단한 여성 리더십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29살의 당찬 베팅, 라망시크레의 무대에 오르다
다양한 업장에서 탄탄한 내공을 쌓아가던 그는 2018년, 커리어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29살의 나이에 레스케이프 호텔 '라망시크레'의 오픈 멤버이자 헤드 소믈리에로 합류하게 된 것이다. 호텔에서의 근무는 대학 시절의 실습을 제외하면 미지의 영역이었지만, 그의 가슴을 뛰게 한 것은 새로운 도전에 대한 열망이었다. 당시 국내 다이닝 씬에 불어닥친 내추럴 와인 열풍에 발맞춰 라망시크레는 파격적인 와인 리스트를 기획하고 있었고, 손종원 셰프라는 새로운 파트너와의 호흡 역시 그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라망시크레는 그가 그동안 쌓아온 모든 감각과 노하우를 시험해 볼 수 있는 완벽한 무대였다.
2018년, 라망시크레의 오픈과 함께 시작한 최은혜 소믈리에.
6년 연속 미쉐린 스타의 비밀, '가족'과 '자율성'
라망시크레가 오픈 2년 만에 미쉐린 1스타를 거머쥐고, 이를 6년 연속으로 지켜낼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일까? 최은혜 소믈리에는 주저 없이 '조직 문화'를 꼽는다. 라망시크레의 백스테이지는 철저하게 가족 같은 끈끈함으로 묶여 있다. 고객과 마주하는 무대 위에서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룰이 작동하지만, 브레이크 타임이 되면 직원들은 편하게 서로가 삶의 이야기를 나누며 업무의 긴장감을 해소한다.
이러한 유연함은 곧 서비스의 퀄리티로 직결된다. 특히 라망시크레는 직원 개개인의 개성과 접객 스타일을 존중하며, 그들이 자신의 고객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도록 폭넓은 자율성을 부여한다고. 덕분에 직원들은 맹목적으로 매뉴얼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벤트를 기획하고 단골손님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는 등 주도적인 전문가로 성장했다. 높은 이직률로 골머리를 앓는 다이닝 업계에서 라망시크레의 서비스 팀이 이토록 오랜 시간 멤버 변동 없이 단단한 호흡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견고한 시스템의 중심에는 손종원 셰프가 있다. 최은혜 소믈리에는 그를 '가족'이자 든든한 '방패막'으로 표현한다. 주방에서는 누구보다 예리하고 완벽을 추구하지만, 무대 뒤에서는 모두를 완벽하게 포용하며 묵묵히 팀을 지탱한다. 이러한 리더의 존재는 라망시크레가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가장 강력한 구심점이다.
6년째 미쉐린 스타를 지켜내고 있는 라망시크레.
페어링의 미학, 1부터 10까지의 치밀한 퍼즐 맞추기
최은혜 소믈리에가 정의하는 완벽한 페어링은 명확하다. '고객이 셰프의 음식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돕되, 음식의 빈자리를 와인으로 완벽하게 메워주는 것'이다. 라망시크레의 시즌 페어링이 완성되기까지는 감각에만 의존하지 않는 치밀하고 정교한 과정이 선행된다. 시즌이 바뀌기 최소 두 달 전, 손종원 셰프가 주재료의 화두를 던지면 그때부터 그의 머릿속에서는 거대한 퍼즐 맞추기가 시작된다.
예를들어 수박에 꼼떼 치즈를 더할지, 캐비아에 어떤 채소를 곁들일지 셰프의 방향성이 정해지면, 그는 이 디시를 어떤 와인과 매치할지 끊임없이 시뮬레이션한다. 수많은 논의와 테이스팅을 거쳐 셰프의 요리와 소믈리에의 와인이 완벽한 상호보완을 이뤄낼 때, 그는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나아가 최은혜 소믈리에는 고객의 세밀한 취향까지 포용하는 '커스터마이징 페어링'까지 제공한다. 특정 품종이나 특정 와인을 선호하지 않는 고객을 위해 기꺼이 페어링의 구성을 재구성한다. "라망시크레의 페어링은 한마디로 '사랑'입니다. 손님의 음식이 끝나기도 전에 잔이 비어 있는 것을 제가 견디지 못하거든요." 넘치는 인심으로 와인을 넉넉히 서브한다는 그의 미소에는, 환대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이 담겨 있다.
무대 위의 지휘자에서 시스템을 설계하는 기획자로
현재 최은혜 지배인은 개인의 화려한 성취를 넘어, 조직의 시스템과 후배들의 성장을 바라보는 관리자의 시선을 갖추어 나가고 있다. 소믈리에일 때는 와인을 완벽하게 서비스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면, 지배인이 된 지금은 한 발자국 물러서서 팀원들을 서포트하고 전체의 흐름을 조율하는 데 집중한다. 지배인 역할을 수행하며 후배들에게 기회를 열어주고, 그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에 깊은 책임감을 느낀다고.
그는 후배 소믈리에들을 향해 "자신의 취향과 기준에만 갇혀 있기보다는 팀원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주방과 홀, 고객 사이에서 지렛대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와인에 대한 편협한 고집을 버리고, 많이 마셔보고 그것을 유려한 언어로 뱉어낼 줄 아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기술적인 완벽함을 넘어,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공감 능력이 진정한 소믈리에의 자질임을 역설하는 대목이다.
소믈리에에서 지배인으로, 전체의 흐름을 조율하는 최은혜 지배인.
그의 시선은 이제 더 먼 미래를 향해 있다. 단기적으로는 라망시크레라는 브랜드가 세계적인 미식의 반열에 올라 현재의 동료들과 오래도록 함께 나아가는 것이며, 장기적으로는 호텔 내의 다양한 업장과 인력을 아우르는 '식음팀장'으로서 자신의 손길이 닿은 획기적인 베버리지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이다.
견고한 편견의 벽을 부수고 자신만의 독보적인 색깔로 다이닝의 공기를 지배하는 최은혜 소믈리에. 와인이라는 언어로 매일 새로운 예술을 써 내려가는 그의 무대는, 앞으로도 오래도록 고객들의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짙은 여운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