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의 디저트에는 오랜 시간 주방에서 쌓아온 기술과 자신이 좋아하는 맛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담겨 있다. 호주의 프렌치 베이커리에서 파인다이닝 주방과 홍콩의 팝업을 거쳐 서울숲에 자리 잡기까지, 그가 지나온 시간을 따라가 본다.
클레어(김정숙) 셰프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의 유쾌함 덕에 웃음이 난다. 평소 군것질을 좋아해 맛있는 과자를 발견하면 직접 만들어보고 싶어진다고 하고, 세상에는 천재적인 파티시에가 많지만 자신은 그저 매일 열심히 만드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일을 설명할 때조차 거창하거나 어려운 표현을 앞세우지 않는다. 그런데 그가 만드는 디저트를 먹어보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케익바의 딸기 코코넛 케이크는 코코넛의 고소한 향과 크림의 부드러움, 딸기의 산미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에그타르트 역시 바삭한 셸과 크리미한 커스터드의 대비가 선명하다. 먹을수록 다음 한 입이 궁금해지는 맛이다.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클레어가 처음부터 파티시에를 꿈꿨던 것은 아니다. 대학에서는 푸드 스타일링을 전공했고, 사진 수업에서 접한 해외 잡지 속 디저트와 공간에 매료됐다. 당시에는 파티 플래너처럼 미적 감각을 활용하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호주로 떠났고, 그곳에서 르 코르동 블루에 입학해 제과를 공부했다.
호주에서 페이스트리 셰프로 일하던 클레어 셰프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시드니의 프렌치 베이커리 빅투아(Victoire)였다. 학교에서 배웠지만 실제로 먹어본 적은 없었던 에클레르와 브리오슈가 쇼케이스에 진열된 것을 보고 그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마음먹었다. 면접을 보러 갔던 날에는 잊지 못할 장면을 마주했다. 흰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몸에 꼭 맞는 셰프 재킷과 청바지를 입은 프랑스인 여성. 뿔테안경을 쓴 채 레몬 제스트를 갈고 있던 빅투아의 오너였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때 처음 생각했어요.”
클레어는 빅투아에서 여러 해 동안 일하며 실무의 기반을 다졌다. 이후 테츠야스(Tetsuya's), 벤틀리(Bentley), 사케(Saké), 소쿄(Sokyo) 등 호주의 레스토랑에서 경험을 쌓았다. 당시에는 더 화려한 기술을 배우고, 더 큰 책임을 맡고 싶었다. 페이스트리 섹션의 책임자가 되었음에도 역할에 한계를 느끼자 메인 키친의 플레이팅을 거들고 패스 운영을 배우다가 결국 수셰프로 영역을 넓혔다.
그 과정에서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소진되는 날들이 있었고, 날카로운 피드백을 받고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특히 다양한 식이 제한에 맞춰 맛과 완성도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는 일은 큰 부담이었다. 버겁게 느껴졌던 경험들은 지금 새로운 디저트를 개발하는 자산이 됐다. 제한된 재료 안에서 대안을 찾는 유연함을 길렀고, 온도와 질감, 서비스의 흐름과 손님이 먹는 순간까지 생각하는 시야를 얻었다.
케익바의 디저트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
클레어에게 또 하나의 전환점은 홍콩에서 찾아왔다. 2018년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클레어 드 룬(Claire de Lune)' 팝업을 진행했다. 잘 갖춰진 레스토랑 주방과 달리 팝업에서는 재료 공급업체를 찾는 일부터 메뉴 개발, 작업 환경을 갖추고 판매하는 일까지 직접 해결해야 했다. 원하는 장비와 재료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앞서 한국에서 진행했던 팝업에서도 비슷한 한계를 경험했던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런 장비가 없으면 나는 디저트를 못 만드는 건가? 왜 자꾸 예전에 했던 방식으로만 하려고 할까?” 누구도 자신의 경력이나 직책을 모르는 도시에서 디저트만으로 평가받고 싶었다. 낯선 환경에 맞춰 작업 방식을 바꾸고 현지 직원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면서, 그가 생각하는 프로의 의미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제가 어디에서 일하는 사람인지 보여주려고 에너지를 많이 썼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것들을 내려놓고 나니까 지금 이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프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플레이버타운에서 케익바까지, 두 셰프가 만드는 공간
한국으로 돌아온 클레어는 남편인 이태규(TK) 셰프와 함께 서울숲 인근에 플레이버타운(Flavourtown)을 열었다. 중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아시아 요리를 선보이는 레스토랑으로, 오랫동안 해외에서 요리해온 두 사람의 경험과 취향이 담긴 곳이다.
부부가 함께 문을 연 플레이버타운에서 TK셰프와 클레어 셰프
이후 같은 건물에 문을 연 케익바(Cakebar)는 함께 일하던 페이스트리 셰프가 디저트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고민하면서 탄생했다. 레스토랑에서는 디저트 주문이 적으면 다른 업무를 해야 하는 경우가 생겼고, 클레어 역시 과거에 비슷한 갈증을 느꼈다. "그 친구가 계속 페이스트리 일을 하려면 디저트만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여기에 플레이버타운을 찾는 손님들이 식사 전후로 편하게 머무를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더해졌다. 다만 카페가 아닌 바라는 형태를 선택한 데에는 현실적인 판단도 있었다. "카페에서 술을 마시는 것과 바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 중에 어떤 게 더 자연스러울까 고민했어요.” 손님들이 받아들이는 경험과 가격, 운영의 지속 가능성을 함께 고려한 결과였다. 그렇게 케익바는 커피부터 위스키와 코냑까지 다양한 음료와 디저트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됐다.
케익바에서 술을 주문하면 내어주는 작은 캐러멜 샌드 쿠키. 얇은 초코 쿠키 사이에 말차 캐러멜이 들어 있다.
두 셰프의 시너지는 디저트 개발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케익바에서 술을 주문하면 함께 곁들여지는 작은 구움과자, 카라멜 샌드 역시 TK 셰프의 제안에서 시작됐다. 홍콩에 있을 때 지인이 일본에서 사 온 카라멜 샌드 과자를 먹고 남편이 직접 만들어보라고 권했던 것이다.
초콜릿 풍미의 쿠키 사이에 말차 카라멜을 샌드해 자신만의 조합을 만들었다. 홍콩의 더운 날씨 속에서 쿠키의 두께와 식감, 카라멜의 물성을 조절하며 재료를 다루는 방법을 익혔다. 클레어가 맛과 기술로 아이디어를 구체화한다면, TK 셰프는 자신의 취향과 고객의 입장에서 다른 가능성을 제안한다.
한 포션을 끝까지 맛있게 만드는 방법
케익바를 대표하는 딸기 코코넛 케이크는 코코넛 다쿠아즈와 크림, 딸기가 층을 이룬다.
“사실 완전히 저의 창작물은 아니에요.” 호주 빅투아에서 만들었던 추억의 케이크를 지금의 형태로 발전시킨 제품이다. 당시에는 전날 남은 케이크를 다음 날 아침에 먹을 수 있었는데, 클레어는 그 코코넛 케이크가 남아 있기를 기대하며 새벽에 출근하곤 했다. "아침에 출근해서 그게 남아 있으면 먹을 수 있었거든요. 정말 좋아했어요."
다시 만들면서 달라진 것은 재료를 다루는 방식이었다. 미리 완성해 진열한 케이크는 시간이 지나면서 딸기에서 수분이 나오고 질감이 변한다. 자신이 가장 맛있게 먹었던 순간을 전하고 싶었던 클레어는 계절에 따른 딸기의 차이와 크림의 조합, 서비스 방식을 조정했다. 여름의 망고 코코넛 케이크도 과일만 교체한 제품이 아니다. 망고의 당도와 산미에 맞춰 별도의 균형을 잡았다. 추억에서 출발한 케이크에 그가 쌓아온 경험이 더해진 것이다.
그가 디저트를 개발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한 입의 강렬한 맛보다 한 포션을 끝까지 먹었을 때의 만족감이다. "저는 테이스팅할 때 한 포션을 혼자 다 먹어봐요. 한두 입은 맛있는데 먹다 보면 너무 달거나 질리는 경우가 있거든요. 한 사람이 끝까지 즐겁게 먹을 수 있는지가 중요해요."
새로운 아이디어는 소박한 곳에서 얻는다. 군것질을 좋아해 맛있는 과자나 초콜릿 바를 발견하면 자신만의 방식으로 만들어보고 싶어진다. 최근 특히 관심을 두는 것은 에그타르트다. 홍콩에서 남편과 여러 가게를 다니며 맛본 뒤, 자신이 원하는 형태를 찾았다. 버터 향이 지나치게 무겁지 않은 담백하고 바삭한 셸과 부드럽고 진한 커스터드. 식감과 맛이 대비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에그타르트다.
셸의 질감은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기에 언제 굽고 어떻게 판매할지도 중요하다. 지금은 주문 제작이 중심이지만 더 많은 손님에게 좋은 상태로 전할 방법을 고민한다. 말린 감을 활용한 가을 에그타르트처럼 계절의 재료도 담아보고 싶다고 한다.
클레어가 추구하는 디저트의 방향은 오히려 과거보다 단순해지고 있다. 한때는 더 화려한 기술과 복잡한 구성을 배우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지만, 지금은 예전에 만들었던 디저트를 다시 해석하고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내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
"예전에는 테크닉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좀 더 단순하고 정갈한 것들이 좋아요. 본질에 가까워지고 싶은 거죠.” 그리고 그가 덧붙인 말은 지금의 케익바가 지향하는 맛을 잘 설명한다. "한 번쯤 먹어보고 싶은 디저트보다 오늘도 먹고 싶고 내일도 먹고 싶은 디저트를 만들고 싶어요.”
보여주는 일보다 오래 지속하는 일
자신의 가게를 운영하면서 가장 달라진 점은 모든 것을 주체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레스토랑에서는 시즌 메뉴나 이벤트가 새로운 디저트를 개발할 이유가 됐지만, 지금은 스스로 과제를 정해야 한다.
케익바에서 반갑게 손님을 맞이하는 클레어 셰프
생산량과 동료들의 업무, 서비스와 매장 운영도 고려해야 한다. 처음에는 카운터에서 마무리하는 디저트와 다양한 주류 페어링을 더 적극적으로 선보이고 싶었다. 메뉴가 적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지만, 무작정 종류를 늘리면 준비 과정이 복잡해지고 품질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우리는 쇼룸이 아니잖아요. 실제로 영업을 해야 하니까요." 클레어는 지금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기보다 현재의 환경에서 가장 좋은 것을 만드는 쪽을 택한다.그렇다고 새로운 시도를 멈춘 것은 아니다. 백화점 내의 팝업 스토어나 외부 마켓에 참여하고 여러 브랜드와 협업하면서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디저트를 선보인다.
마켓에서는 여러 가지를 조금씩 먹고 싶어 하는 손님들을 위해 작은 쿠키와 커피에 곁들이기 좋은 타르트를 준비한다. 판매 시간과 설비에 맞춰 매장과 다른 메뉴도 선보인다. 준비할 때면 일이 많아져 스스로도 웃음이 난다고 한다.
"가끔 제가 너무 웃겨요.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나 싶어서요." 그러면서도 다음 마켓과 협업을 준비한다. 다른 브랜드와 그 고객을 생각하며 제품을 개발하는 과정이 즐겁고, 평소 하지 않던 시도가 새로운 아이디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누가 크래커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 있다. 케익바의 디저트를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지만, 기존 제품들은 배송이나 보관에 제약이 많기 때문이다. 달콤하면서도 짭짤한 누가 크래커는 견과류나 향신료를 더해 다양한 맛을 표현할 수 있고, 계절에 따라 변화를 주기에도 좋다. “디저트는 생각날 때 하나씩 꺼내 먹고 싶잖아요. 어른부터 아이까지 누구나 맛있게 먹고, 함께 나눠 먹을 수 있는 걸 만들고 싶어요.” 새로운 제품을 구상하는 이야기를 하는 클레어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설렘이 묻어난다.
오래 함께 일하는 사람들
클레어는 요즘 자신이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것만큼이나 함께 일하는 동료가 성장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오랫동안 제과와 레스토랑의 주방을 경험한 그에게 익숙한 작업도 이제 막 페이스트리를 시작한 셰프에게는 새롭고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젊은 동료의 질문을 듣다 보면 자신이 처음 제과를 배우던 시절이 떠오른다고 한다.
케익바의 모토가 되는 Classic Never Dies
최근에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메뉴보다 동료가 만들어보고 싶어 하는 디저트를 함께 개발하는 일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레시피를 알려주고 그대로 만들게 하는 것보다 왜 그렇게 되는지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뭔가 잘못됐을 때 스스로 고칠 수 있고, 자기 경험으로 새로운 디저트를 만들 수 있거든요.” 자신이 배워온 기술과 경험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일. 지금의 클레어에게는 그 역시 새로운 배움이자 즐거움이다.
그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단순히 직원이라기보다 동료라고 생각한다. 고단한 주방에서 하루를 견딜 수 있었던 것도 결국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힘들고 의견이 맞지 않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들과 함께 보낸 시간들이 쌓여 지금까지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물론 자신의 가게를 운영하는 지금은 새로운 고민도 있다. 구성원들이 너무 편안한 환경에 익숙해져 성장을 멈추는 것은 아닐지, 반대로 자신의 욕심 때문에 지나치게 힘들어하는 것은 아닐지. 좋은 동료이자 운영자로서 어디까지 이끌고 어디에서 기다려야 할지 여전히 답을 찾는 중이다.
그의 관심은 지금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먼 미래로도 이어진다. 오랫동안 주방에서 일한 셰프들은 나이가 들면서 체력적인 한계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쌓아온 기술과 경험이 그 순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클레어는 숙련된 셰프들이 연구 개발이나 교육 등 다른 역할로 일을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20년, 30년 동안 전문적으로 일한 사람들이잖아요. 그들이 가진 기술과 경험이 얼마나 많은데, 나이가 들었다고 그만둬야 한다는 게 너무 아까워요.” 셰프와 서비스 전문인이 오래도록 직업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케익바가 앞으로 어떤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에는 특별하면서도 편안한 공간이 되고 싶다고 답했다. 그가 말하는 특별함은 화려하거나 값비싼 경험이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 케이크를 먹었던 날, 친구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던 저녁, 기념일을 보내기 위해 찾아왔던 순간. 시간이 지나도 그런 기억이 떠오르는 곳이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음악을 들으면 어떤 순간이 떠오를 때가 있잖아요. 우리 가게도 누군가에게 그런 공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처음 제과를 시작했던 시드니의 빅투아 이야기도 다시 등장했다. 그곳에서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할머니부터 손주까지 3대가 함께 빵과 케이크를 사러 왔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방문하던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어 다시 가게를 찾기도 했다. 지금 케익바에도 어린 단골손님들이 있다. "그 아이들이 다 커서 대학생이 됐을 때도 제가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 꿈이에요."
한때 더 크고 화려한 주방에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고 싶었던 셰프는 이제 한자리에서 오래 일하는 모습을 꿈꾼다. 20년 뒤에도 케이크를 굽고 싶냐고 묻자 망설임 없이 답했다. "하고 싶어요. 평생 해야죠." 시드니에서 레몬 제스트를 갈던 빅투아 오너를 보며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던 클레어. 이제는 서울숲에서 케이크를 굽는다. 어린 손님이 어른이 되어 다시 찾아왔을 때도 여전히 웃으며 케이크를 만드는 사람. 클레어가 꿈꾸는 파티시에의 모습은 처음부터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