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차밭에서 '무국적'의 차로, 차의 티에리스 정다형 대표

영국의 홍차에서 시작해 지금은 넓은 차의 세계에서 머물며 많은 셰프들과 함께 레스토랑의 식탁에 올릴 차를 설계하는 사람. 싱글 에스테이트 홍차 전문점 티에리스, 정다형 대표의 이야기다.

블루오션인 줄 알았던 블랙오션

티에리스의 시작은 2009년, 우상원 대표가 문을 열면서다. 티에리스를 열기 전 우 대표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일하던 애니메이터였다. 그가 일본 기치조지에서 일하던 시절, 동네에 싱글 에스테이트 티를 파는 작은 가게들이 은근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한국에는 이런 가게가 아직 없으니 들어오면 잘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블루오션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블루오션이 아니고 블랙오션이었던 거죠. 남들이 안하는데는 이유가 있었던거에요.” 정다형 대표는 웃으며 말했다. 한국과 일본이 홍차를 대하는 태도는 두 나라의 언어만큼이나 달랐다. 일본에서는 이미 차문화가 일상적으로 자리잡았지만 당시 홍차란 한국에서는 마니아층만 즐기는 음료에 가까웠다. 그렇다보니 수입한 찻잎이 도무지 소진되지가 않았고, 2011년 무렵 남은 재고를 털어 보려고 티룸을 열기로 했다. 그는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리쉬티(Rishi Tea)에서 일하던 정 대표에게 도움을 청했다. “얘기를 들어나보자 하고 가 보았더니 사정이 너무 처참한거예요. 그렇게 돕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결혼했더라고요.”

예상대로 쉽지는 않았다. 2010년대 초반까지는 그래도 서양 홍차의 인기가 조금은 있었지만, 2020년대로 넘어오면서 시장은 동양차 쪽으로 확연히 기울었다. 영국 홍차 산지를 베이스로 한 싱글 에스테이트 티 전문점은 지금도 한국에 티에리스뿐이다. 정 대표의 표현으로는 싱글 에스테이트 티 업계는 “17년째 여전히 불모지”다.

 

차를 마시는 정다형 대표

 

영국에는 '티 클래스'가 없었다

정다형 대표가 처음 영국에 간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영국 홍차를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가 보니 그곳에서 차는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영국 사람들은 티백을 머그컵에 두세 개씩 넣고, 전자레인지에 돌려 마시고 있었다. 우아한 애프터눈 티를 상상하고 영국에 도착한 사람에게는 꽤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당시에는 현지에서 티 클래스라는 것도 찾기가 어려웠다. “배우는 문화가 아니라 일상의 문화인 거죠. 우리나라에 숭늉 만들어 먹는 클래스가 없는 것처럼요.”

 

인도 콜카타의 짜이가게

여기서는 배울 게 없겠다 싶어 향한 곳이 인도였다. 차를 연구하는 기관과 제다, 품종이 남아 있던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인도에서도 차는 고급 문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가 맥심 모카골드를 타 마시듯 짜이를 마시는 나라, 영국에 수출하고 남은 차를 우유에 끓여 마시는 데서 시작된 일상의 차. 영국과 인도 모두에게 차라는 것은 기호식품이 아니라 생필품이었다.

그리고 그가 향한 곳은 일본. “일본은 또 달랐어요. 동아시아의 차 문화와 홍차가 결합하면서 영국에도 없는, 일본만의 고급 홍차 문화가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정 대표는 이런 사실을 나중에야 깨닫는다. 한국에서 ‘홍차 문화’라고 여겨 온 것은 영국의 홍차 문화라기보다 일본을 거쳐 들어온 영국 홍차 문화에 가깝다는 것을.

 

인도의 한 다원에서 만난 차 수확 현장

 

세상에 하나뿐인 차, 싱글 에스테이트 티

그렇다면 싱글 에스테이트 티는 무엇이 다를까? 정 대표는 ‘공산품’과 ‘농산품’의 차이로 설명한다. 유명 브랜드의 다르질링은 해마다 같은 맛이어야 하기 때문에 여러 농원, 여러 시즌의 차를 섞는다. 반면 티에리스는 다르질링의 80여 개 농원 차를 일일이 시음하고, 그 시즌에 가장 빼어나다고 생각하는 차만 골라 온다. “하나하나 인보이스 번호가 붙은 단일 배치의 차예요.”

같은 농원의 같은 품종인데도 해마다 맛이 다르다. “그게 싱글 에스테이트 티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에 하나뿐인 차, 일회성의 매력이요.” 장인이 만든 차는 해마다 다르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오히려 익숙한 개념이고, 서양 홍차에서는 2000년대 이후에야 새로 '발견'된 개념이라고 그는 말한다.

 

네팔에 위치한 준치야바리 다원

한 시즌에 고르는 차는 서너 가지다. 차를 선택하는 기준 중 하나는 그 산지를 가장 잘 대표하는 모범적이고 빼어난 차이고, 또 하나는 이전까지 없던 보기 드문 차다. 후자의 대표가 네팔 준 치야바리 다원의 '히말라얀 로열 루비'였다. 일본과 대만의 차나무를 히말라야에 심어 만든 소량 생산 홍차인데, 정 대표에게는 처음에 우리나라 잭살처럼 묘하게 익숙한 맛이었다. 서양인들에게는 아주 새로운 느낌이겠지만, 우리에게는 익숙한 느낌의 차일 것이라 고민했지만, 오너인 바찬을 믿고 전량을 수매했다. 그런데 사 두고 3년쯤 잊고 지내다 우연히 다시 마셔 보니 꿀 향이 엄청나게 올라와 있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싱글 에스테이트 티의 매력 중 하나죠. 그래서 테이스팅을 하며 차의 지금 모습만큼이나 미래의 모습까지 상상해 보아야 합니다.”

 

다르질링의 티 테이스팅 현장

 

셰프의 주방에서, 차의 자리를 찾다

티에리스는 여러 레스토랑과 함께 차 메뉴를 만들어 왔다. 정다형 대표가 꼽은 협업처만 해도 산, 밍글스, 이스트, 본앤브레드, 기가스가 있다. 각 레스토랑에 맞는 블렌드를 만들기도 하고, 단일조합의 차를 추천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작업은 요리를 먹어 보고, 레스토랑이 무엇을 원하는지 듣는 데서 시작한다.

그다음은 레스토랑의 분위기와 요리의 톤에 맞춰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의 차를 베이스로 쓸지 정하는 일이다. 그 위에 어떤 재료를 얹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가장 길다. 손님 대부분이 마시는 차이기 때문에 취향을 가리지 않아야 하고, 그래서 베르가못처럼 호불호가 갈리는 재료는 쓰기 어렵다. 반대로 한국 레스토랑은 한국에서 나는 재료를 꼭 넣고 싶어 하는 경향도 있다. 보편적인 맛과 레스토랑의 정체성 사이 어딘가가 매번의 답이 된다.

 

레스토랑과의 협업으로 선보이는 차들은 해당 레스토랑 단 한군데서만 만나볼 수 있다.

밍글스를 위해 만든 블렌드 ‘밍글스 브렉퍼스트’가 그 예다. 영국의 브렉퍼스트 블렌드는 커피 전문점의 하우스 블렌드 같은 차다. 이름 그대로 아침 식사와 함께 마시는 차이고, 영국의 아침 식사는 기름지고 짭짤하다. 밍글스에서는 서양 홍차가 말하는 그 기본 위에 한국의 잭살을 넣어 변주했다. 매일 마셔도 질리지 않는 보편적인 홍차처럼 느껴지면서, 레스토랑의 정체성도 담은 차다.

요리에 따라 난이도도 달라진다. 양식에 차가 더 어울릴 것 같지만, 사실은 채소를 많이 쓰고 베이스가 가벼운 한식이야말로 오히려 차와 잘 맞았다고 한다. 반면 클래식 프렌치를 추구하는 셰프와의 협업은 쉽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묵직한 팔레트가 특징이기 때문에 오히려 쓸 수 있는 차가 제한적이었다. 셰프는 요리를 최대한 가볍게 만들려 애쓰고, 티에리스는 그 요리에 밀리지 않는 차를 준비해야 했다. 프렌치는 확실히 와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차로는 와인만큼의 시너지를 내기가 어렵다는 것이 정 대표의 경험이다. “하지만 그만큼 의미 있는 작업이었죠. 꼭 맞는 차를 찾아내는 일이란 늘 도전 정신을 자극하니까요.”

아직은 식사 중 페어링보다 코스의 마지막에 나가는 차, 또는 디저트와 함께 낼 차를 원하는 곳이 많지만, 해외의 트렌드 중 하나인 티 페어링을 한국에서도 시도해 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페어링의 원칙은 단순하다. 차의 플레이버와 요리의 맛과 향이 어느 정도 이어지되, 차가 묻히지 않을 것.

 

티에리스에서 진행했던 티 페어링 행사 현장

 

한식 곁에 놓는 차

한식과 차의 궁합에 대해 묻자 정 대표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즐겁게 이야기했다. “가을이라면 단연 고구마와 단호박에 아쌈 홍차예요. 아쌈 특유의 몰티하고 단 향이 고구마와 만나면 더할 나위가 없거든요.” 의외로 기름지고 매콤한 요리류도 좋은 짝이다. 다르질링 세컨드 플러시나 오텀널을 곁들이면 고추의 향과 홍차의 향이 잘 어우러진다고 한다. 차는 케이크와 마신다는 생각을 잠시 내려놓아도 좋다. 사실 생각해 보면 영국에서 홍차에 곁들이는 음식은 스콘이나 치즈샌드위치 등 기름지고 짭조름한 것들이다.

한국 차만으로 한식 코스를 맞출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는 “저는 적극 추천해 드리고 싶어요”라고 답했다. 요즘 한국 차는 6대 다류를 두루 만들고 백차도 만들며 품질도 좋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티 페어링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가격이다. 좋은 차가 비싸다고는 해도 와인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저렴한 편이다. 하지만 한국 고객들이 티 페어링에 얼마를 쓰고 싶어 하느냐, 얼마까지 쓸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말한다. 정 대표는 와인 페어링과 티 페어링 가격이 비슷하다는 것을 납득시키기는 아직 어렵겠지만, 분명 언젠가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다르질링에서 티 테이스팅을 하고 있는 정다형 대표

 

'영국 홍차'라 불리지 않는, 새로운 시대의 차를 가장 가까이서 목도하는 일

지금의 티에리스와 정다형 대표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차 한 잔을 꼽아 달라는 질문에, 그는 다르질링 세컨드 플러시를 골랐다. 가장 메인 시즌의 다르질링이면서,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새로워질 여지가 많은 차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새로운 품종들은 아직 그 가능성을 다 보여 주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은 차를 우리는 방식에서도 영국식에 국한되지 않으려 한다. 다르질링 퍼스트 플러시를 티포트가 아닌 개완에 우려내고, 네팔과 인도의 새로운 산지를 찾아다니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 차들은 이제 더 이상 영국 홍차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지 않아요. 영국 사람들이 뿌려 놓은 씨앗이지만, 이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보는 것도 제 즐거움이에요.” 제국주의 시대의 플랜테이션이 그 틀에서 어떻게 자유로워지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라고, 정 대표는 설명한다.

 

티에리스 티테이스팅룸에서 만나볼 수 있는 장면들

차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차는 배워야만 마실 수 있다는 오해를 내려놓았으면 좋겠다는 것.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은 ‘커피 잘 몰라요.’라고 하지 않는데, 차를 좋아한다고 하면 곧바로 ‘차는 잘 몰라서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고 한다. “저는 ‘제대로’라는 말을 별로 안 좋아해요. 차는 컵라면 같은 거예요. 물 붓고 3분 지나면 마실 수 있는 거잖아요.” 영국 사람들도 전자레인지에 티백을 돌려 마시는데, 우리가 뭘 그렇게 조심할 필요가 있느냐는 말처럼 들렸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취향을 찾아가는 과정. 정다형 대표가 말하는 좋은 차 문화는 그런 모습이었다.

단락

Writer 김나영 (Nayoung Kim)
Editor 이정윤 (Julia Lee)
Photographer Nayoung Kim, 티에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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