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재료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날과 함께 떠오르는 칵테일을 만든다.
서촌의 좁은 골목, 나무 문을 밀고 들어서면 잘 익은 사과 향이 스친다. 김현철 바텐더가 직접 만들어 입구 위에 달아둔 향이다. 정면에 자리한 큰 창으로는 햇빛이 들고, 그 빛이 닿는 자리마다 식물이 놓여 있다. 프랑스어로 사과를 뜻하는 이름의 ‘뽐’은 2020년 서촌에 문을 열었다.
입구에서 시작되는 사과 향, 그리고 창으로 드는 햇빛
커다란 문을 처음 열었던 날
김현철 바텐더가 이 길에 들어선 것은 2007년이다. 전역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던 중 조주기능사라는 자격증을 알게 됐다. 필기는 통과했지만 실기는 실제로 칵테일을 만들어본 경험이 없어 준비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경험도 쌓을 겸 전역 직후 처음 바에서 일을 시작했다.
"저도 제가 이렇게 오래 바텐더를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첫 면접을 보러 갔던 날, BAR라고 쓰인 커다란 문을 열고 처음 그 공간으로 들어갔을 때 느꼈던 설렘과 긴장감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이후 김현철 바텐더는 JW 메리어트 동대문에서 커리어를 쌓았다. 호텔에는 체계적인 서비스 매뉴얼과 기준이 있었고, 손님을 조금 더 세심하게 살피는 법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다. 원가와 재고 관리부터 위생과 안전까지, 하나의 업장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 필요한 요소를 체계화하는 방법도 그곳에서 배웠다. 지금 뽐은 호텔에 비해 작은 공간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의 운영 방식에는 당시의 기준이 상당 부분 남아 있다.
칵테일을 연구하는 중인 김현철 바텐더
가까이 있되, 각자의 색으로
뽐은 바 참(Bar Cham)에서 걸어 3분 거리에 있다. 참과 참 제철, 그리고 뽐까지 서촌의 세 공간은 임병진 바텐더가 만들었다. 공감을 화두로 삼아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길어 올린 재료를 칵테일로 옮겨온 그는, 서촌에 자리한 참을 한국의 전통주와 토종 식재료를 앞세운 바로 이끌며 아시아 50 베스트 바에 여러 해 이름을 올려왔다. 뽐 역시 임병진 바텐더가 2020년에 문을 열었고, 현재는 김현철 바텐더가 이끌어가고 있다.
두 사람이 바란 것은 뽐이 뽐만의 색을 갖는 일이었다. 김현철 바텐더가 합류하며 나눈 이야기도 그 지점에서 시작됐다.
"김현철 바텐더가 오면서 처음 바꾸고 싶어 했던 것이 참의 2호점이라는 개념을 지우는 일이었습니다. 독자적으로 다른 색을 유지하고 싶어 했고, 그래서 제가 일부러 뽐 쪽에 관여를 하지 않는 것도 있어요."
지금 뽐의 메뉴는 김현철 바텐더가 완성한 뒤, 마지막에 임병진 바텐더가 의견을 보태 다듬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 가능한 방식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5년쯤 전 칵테일 대회에서였다. 임병진 바텐더가 기억하는 그의 첫인상은 강직한 사람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이라 처음에는 다소 딱딱하게 느껴졌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믿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15년 전 처음 만난 임병진 바텐더(좌)와 김현철 바텐더(우)
오래 기억되는 한 잔
뽐이 추구하는 칵테일의 방향을 한 문장으로 표현해달라는 질문에, 김현철 바텐더는 오랫동안 기억되는 맛이라고 답했다.
"칵테일이나 음식은 단순히 맛만으로 기억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그날의 분위기와 기분은 어땠는지까지 모두 합쳐져 하나의 기억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뽐의 칵테일도 맛있었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날의 순간과 함께 떠오를 수 있는 한 잔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선호하는 스타일은 진하지 않은 쪽이다. 하이볼 같은 가벼운 질감이되 맛은 충분히 지녀야 하고, 알코올이 크게 느껴지지 않으면서도 다채로운 풍미를 품어야 하며, 무엇보다 이름과 직결되는 맛이어야 한다. 레시피를 만들 때 그가 반복해서 던지는 질문도 하나다. 많은 사람이 호불호 없이 마실 수 있는가.
뽐의 시그니처인 사과와 칼바도스
재료를 고르는 기준도 같은 결이다. 사과가 그렇듯, 사계절 내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과일과 재료를 주로 쓴다. 특별하거나 희귀한 재료를 찾기보다 익숙한 재료를 칵테일 안에서 어떻게 새롭게 보여줄지를 고민한다. 과일 하나만 보지 않고 함께 쓰는 채소나 허브, 향신료와의 시너지도 중요하게 여긴다. 각각의 재료가 튀기보다 한 잔 안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에 가장 신경 쓴다는 것이다.
사과에서 출발한 술을 다룰 때도 마찬가지다.
"칼바도스라고 해서 반드시 사과의 맛을 강하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칼바도스 안에는 생사과의 향뿐만 아니라 숙성 과정에서 생기는 나무 향이나 향신료, 때로는 말린 과일 같은 다양한 풍미가 있기 때문에 그 술이 가진 특징을 먼저 이해하려고 합니다."
다른 재료를 더할 때도 칼바도스의 캐릭터를 가리기보다, 원래 지닌 풍미 중 하나를 자연스럽게 확장하는 방향을 택한다. 사과가 중요한 소재인 만큼 사과 맛이 나는 술로 단순하게 접근하기보다, 사과가 술이 되고 숙성되면서 어떻게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지를 보여주는 편이 더 재미있다고 그는 말한다.
뽐만의 메뉴를 설계하는 방법
메뉴를 새로 짤 때 그가 가장 먼저 여는 것은 엑셀 파일이다. 1년간 판매된 모든 메뉴를 뽑아 수치화한다. 호텔에서 일하며 몸에 밴 방식이다. 어떤 스타일이 많이 팔렸는지, 흐름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확인한 뒤 다음 시즌을 설계한다. 해외 출장 역시 자료를 모으는 자리가 된다. 사흘 남짓한 일정에 바를 열다섯 곳가량 돌면서 지금 해외에서 어떤 스타일이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살핀다. 사과를 이름으로 삼았지만 사과 하나에만 기대지는 않는다. 한동안 운영해보니 사과만으로 표현할 수 있는 풍미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사과를 중심에 두고 한국의 로컬 식재료와 제철 과일을 함께 쓰는 방향으로 폭을 넓혀왔다.
바 뽐의 전경
뽐이 전하는 칵테일
애플 마티니라는 이름만 들으면 새콤달콤한 술을 떠올리기 쉽지만, 뽐의 시그니처 가운데 가장 드라이한 칵테일이다. 애플 마티니는 꼭 달아야 할까라는 단순한 물음에서 출발해, 사과의 단맛 대신 껍질에서 느껴지는 향긋하고 드라이한 풍미에 집중했다. 진의 깔끔함과 사과 증류주의 과실 향 위에 피노 셰리와 엘더플라워의 은은한 향이 더해지고, 압생트와 셀러리 비터가 복합적인 허브와 스파이스의 마무리로 이끈다.
뽐의 시그니처 가운데 가장 드라이한 '애플 마티니'
Sour Yoo는 충청도 추풍령에서 재배한 사과로 만든 와인이 베이스다. 김현철 바텐더의 고향이 충청도여서 이름도 사투리에서 가져왔다. 했어유, 그랬어유 할 때의 그 유다. 캐러웨이 씨앗의 향에 허니부시 티의 은은한 단맛이 어우러지고, 발효 콤부차의 청량감이 더해진 산뜻한 사워 스타일이다. 손님에게 설명할 때마다 조금 민망하면서도 애착이 간다고 한다.
충청도 사투리로 이름이 붙여진 사워 칵테일 'Sour Yoo'
통인동 여름 한 입은 뽐이 자리한 서촌과 통인동의 여름 풍경에서 시작한 칵테일이다. 여름에 시장이나 동네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과일의 시원함과 색감을 한 잔에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수박을 중심으로 구아바와 라즈베리, 탄산감을 더해 무겁기보다 가볍게 마실 수 있도록 구성했다. 거창한 무언가를 표현하기보다 통인동의 여름을 한 입 베어 문 것 같은 느낌이 전해지길 바라며 만든 칵테일이다.
뽐의 여름 시그니처 '통인동 여름 한 입'
다시 주문하고 싶을까, 김현철 바텐더의 기준점
오래 사랑받는 메뉴와 금세 사라지는 메뉴의 차이를 묻자 그는 하나의 기준을 들었다. 바텐더 입장에서는 새로운 재료나 기술을 쓴 칵테일에 욕심이 생기지만, 그것이 반드시 오래 사랑받는 칵테일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메뉴를 만들 때 얼마나 새로운가보다는, 이걸 한 잔 마신 손님이 다음에 다시 주문하고 싶을까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려고 합니다."
다시 오고 싶은 이유가 칵테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비스도 같은 기준 위에 있다. 다만 서비스가 곧 친절하게 말을 많이 거는 일은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대화를 원하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조용히 한 잔을 즐기고 싶은 손님도 있다. 좋은 서비스란 손님이 서비스를 의식하지 않으면서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게 그의 정의다. 팀에게 늘 하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서로의 일을 남의 일처럼 여기지 말 것. 각자의 역할은 나뉘어 있지만 손님에게는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뽐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가르치며 다시 배우는 일
김현철 바텐더는 위스키·칵테일 클래스를 운영하고, 오랜 기간 교수로도 활동해왔다. 바에서는 손님이 한 잔을 맛있게 경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면, 클래스에서는 그 한 잔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왜 이런 술을 썼는지, 왜 이런 방식으로 만드는지, 어떤 향과 맛을 느끼면 되는지를 처음 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다시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래 일하다 보면 경험에 기대어 몸이 먼저 움직이는 일이 많아진다. 그러나 배우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하면 된다고만 말할 수 없다. 왜 그래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다시 정리하다 보면 기본을 되돌아보게 되는 순간이 자주 찾아왔다.
"현장이 가르칠 내용을 만들어줬다면, 강의실은 제가 현장에서 해왔던 일을 다시 이해하게 만들어준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쳐 온 김현철 바텐더
김현철 바텐더가 그리는 뽐의 미래
뽐을 향한 관심은 꾸준히 늘어 왔고, 2025 Tatler Best 100 선정도 그 흐름 위에 있다. 그러나 김현철 바텐더의 답은 성취보다 경계에 가까웠다.
"더 유명해지면 좋겠지만, 그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집중이 쏠리다 보면 주변의 것들이나 기본적인 호스피탈리티를 소홀히 할 수 있으니까요."
더 알리기 위해 많은 프로모션을 이어가다 보면 원래의 색을 잃을 수 있다는 것. 초창기부터 찾아온 손님들은 뽐의 따뜻한 분위기를 좋아해서 오는 이들이 많다.
따뜻한 조명과 허브 그림이 걸려 있는 뽐
나무 문을 열면 사과 향이 배어 있고, 큰 창으로 햇살이 들고, 그 빛 아래에서 식물이 자란다. 이름도 영업시간도 콘셉트도 바뀌어왔지만 그 햇살이 공간을 채우는 풍경만은 6년째 그대로다. 결국 오래 남는 것은 가장 새로운 한 잔이 아니라 그날과 함께 떠오르는 한 잔이다. 뽐이 지키는 것도 그 한 잔이 놓이는 자리, 문을 열었을 때의 온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