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를 독자적 미식 언어로 풀어내는 성시우 셰프는 한국형 비건 파인 다이닝의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오랫동안 파인 다이닝에서 주인공 자리는 화려한 육류와 진귀한 해산물이 차지했다. 반면 채소는 언제나 조연에 불과했다. 가볍고 무거운 요리 가운데 채소는 디시의 균형을 맞추거나 색감을 더하는 역할에 머물렀다.
성시우 셰프의 ‘레귬(Légume)’은 채소가 서사의 중심이 되는 무대를 만들어 한국형 비건 파인 다이닝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가고 있다.
그렇기에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오직 채소만으로 코스를 전개하는, 비건 파인 다이닝 ‘레귬(Légume)’의 등장은 하나의 센세이션에 가까웠다. 그리고 2025년, 레귬은 전 세계 단 9곳뿐이자 아시아 최초로 미쉐린 1스타를 획득한 비건 레스토랑이 됐다.
아쉬움이 남긴 수많은 질문과 고민
스와니예에서 오랜 시간 경력을 쌓은 성시우 셰프는 프렌치 파인 다이닝의 정교한 시스템 안에서 막내로 시작해 헤드 셰프에 오르기까지, 한국 다이닝 씬의 움직임을 온몸으로 체감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엔 해결하지 못한 질문이 남아 있었고, 이 시작은 다름 아닌 가족과의 평범한 식사 자리에서 비롯됐다.
육류는 물론 유제품조차 섭취할 수 없는 셰프의 어머니는 아들이 몸담은 최고급 레스토랑에 단 한 번도 발걸음을 할 수 없었다. 날을 잡아 어머니와 함께 다른 동네나 주변, 외곽 등으로 다른 레스토랑을 찾아 나갈 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기나 유제품이 들어가지 않아 먹을 만한 메뉴는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아쉬움을 달래는 ‘대체제’였을 뿐 특정 누군가에 맞춰 정교하게 설계된 미식은 아니었다.
주방의 자투리 채소 반죽으로 구운 쿠키 사이에 녹진한 장단콩 후무스를 채우고 참깨 강정과 허브로 마무리한 레귬의 아뮤즈부쉬, ‘장단콩 후무스를 채운 채소 쿠키 샌드’
그는 당시 마주했던 음식들에 대해 “그냥 때워서 주는 음식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왜 채식을 선호하는 이들을 위한 요리는 늘 부차적인 것으로 남아야 하는지, 누군가 먹지 못하는 식재료가 생겼을 때 요리는 왜 그저 ‘예외를 처리하는 임시방편’이어야 하는지 깊은 의구심이 들었다고 했다.
물론 이러한 질문들이 곧바로 ‘레귬’으로 연결된 건 아니다. 스와니예에서도 채식 코스를 상시 운영하며 손님들의 피드백을 체감했었고, 무수한 성공과 실패는 고스란히 그의 자산이 되었다. 한마디로 ‘데이터가 쌓여 간 시간’을 충분히 거쳤다. 남는 것과 남기지 않는 것, 좋아하는 식감과 싫어하는 향 등 같은 채소라도 어느 순간에 어떤 방식으로 제시해야 완벽하게 설득되는지 또릿한 감각을 기를 수 있었다.
식전, 평온을 불러오는 테이블 세팅. 나무 수저와 냅킨이 놓이는 순간부터 레귬에서의 경험은 시작된다.
그리고 이후 진행했던 팝업은 ‘레귬’을 예고하는 훌륭한 프로토 타입이었고, 훗날 채소 중심 레스토랑을 열겠다는 굳은 결심도 이 무렵 완성되었다. 다만 처음부터 ‘비건’이 선명했던 건 아니다. 베지테리언을 염두에 두고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유제품을 먹지 못하는 이들까지 포용하며 일정한 퀄리티를 내어주기 위해 ‘비건’으로 최종 향하게 됐다.
성시우 셰프는 레시피 북 <더 비건 팬트리>를 통해 셰프이자 저자로서, 누구의 식탁에서든 채소가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소개한다.
육류의 문법을 지우고 써 내려간 채소의 언어
고기와 해산물은 직관적 만족을 주는 식재료다. 전문 요리사가 아니더라도 질 좋은 소고기는 구워 소금만 뿌려내도 어느 정도 충족감을 준다. 재료 자체가 이미 강렬한 매력과 설득력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채소는 다르다. 잘 손질해 불에 올린다고 완성된 미식이 쉽게 탄생하진 않는다.
‘트러플과 헤이즐넛 소르베’와 ‘장단콩 후무스를 채운 채소 쿠키 샌드’. 헤이즐넛만으로 완성한 크리미한 소르베 질감에 트러플 향이 포개지면서 우유와 버터 없이도 리치한 풍미를 자아낸다.
채소는 집요하면서도 디테일하며 감각적인 설계가 필요하다. 식감과 온도, 익힘 정도와 향의 전개 과정, 수분의 밀도와 지방을 대신할 묵직한 질감까지, 무수한 요소들이 훨씬 더 섬세하게 맞물려야 한다. 그래서 채소 요리는 직관적이지 않다.
즉 레귬의 요리는 기존 파인 다이닝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게 아니라 아예 쓰는 언어가 다르다. 이러한 이유로 예전의 문법을 그대로 가져와선 결코 좋은 결과물을 낼 수 없었고, 결국 채소를 바라보는 방법과 과정 자체를 완전히 뒤집어야 했다. 무엇보다 레귬의 요리가 특별한 이유는 채소를 고기의 대체재로 취급하지 않는 데 있다. 육류가 빠진 빈칸을 억지로 채워 넣는 게 아니란 것이다.
스와니예에서 성시우 셰프는 3개월마다 바뀌는 채식 코스와 팝업을 도맡아 운영하며, 성공과 실패의 데이터를 꾸준히 축적해 레귬만의 크리에이티비티를 기를 수 있었다.
성시우 셰프는 메뉴 개발의 영감을 일상적인 식습관으로부터 주로 얻는다. 푹 익은 고구마처럼 부드러운 당근을 좋아하는 사람과 아삭함이 사라진 식감을 지독히 싫어하는 사람, 질기다고 밀어내는 이와 단단함을 즐기는 이. 그는 여러 수많은 채소에 대해 각자 다른 취향을 가진 이들이 식탁 위에서 제각기 선보이는 선호도와 미세한 차이를 유심히 관찰하고, 명확한 해답을 얻으려 망설임 없이 이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렇게 얻은 생생한 답을 채소 요리의 설계도로 끌어온다.
성시우 셰프는 여러 셰프들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과 손님들을 통해 채소를 먹는 방법과 채소에 대한 취향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연구하며, 이를 통해 얻은 답을 그의 채소 요리 설계도로 삼는다.
그래서 레귬의 디시는 한 재료의 단면을 극대화하기보다 여러 가능성의 레이어를 동시에 펼쳐 보인다. 부드러움과 아삭함, 익숙한 질감과 낯선 질감이 교차하는 순간 채소는 조연을 넘어 하나의 입체적인 서사를 이끈다.
실제로 채소 요리의 핵심은 채소 본연이 지닌 ‘수분감’으로, 채즙에 가까운 수분은 풍미의 척도가 된다. 채소가 싱그럽게 또 맛있다고 느껴지는 감각의 80%는 수분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를 레귬에서 현실화하고 있다.
(좌) 레귬의 다이닝 공간은 오픈 키친 형태로 설계되어, 요리가 준비되고 완성되는 모든 순간이 손님과 공유된다. (우) 레귬의 철학은 벽면에 걸린 작품부터 식기 소재 하나까지, 공간 곳곳에 디테일하게 스며 있다.
특히 이 섬세한 감각은 ‘한국적 채식’이란 고유한 정체성으로 이어진다. 서구식 코스 흐름을 따르되, 혀끝에선 푹 끓여낸 국물의 기억이나 은은한 장의 여운, 나물을 씹을 때의 텍스처가 겹쳐 느껴진다. 성시우 셰프는 레귬의 캐릭터와 스타일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한국인의 미각 깊숙이 자리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토마토와 순무, 적근대잎, 냉이가 우러난 ‘채소 수프’. 기교를 내세우기보다 수분과 향의 절제를 택한 이 한 그릇을 통해 제철의 정수를 혀끝에 새길 수 있다.
그래서인지 채소 수프를 들이켰을 때 육개장이나 채개장을 떠올리게 하는 짙은 풍미, 발효 테크닉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그 뼈대를 은밀하게 느끼게 하는 감각들이 모두 전해진다. 이는 외국인 미식가들에게는 또 다른 차원의 새로운 경험이고, 한국인에게는 새롭게 재조립된 익숙함으로 읽힌다.
다시 말해 그는 서구 비건 문법을 단순히 직역하지 않고, 한국의 미각 구조 안에서 채식이 어떻게 고유한 언어로 다시 쓰일지 증명해내고 있다. 더불어 채소의 잠재력을 향상시키면서도 한국적 풍미를 우아하게 확장하려 발효에 대한 연구 및 탐구도 멈춤 없이 이어가고 있다.
밭의 흙내음, 농부의 헌신으로 피어나는 계절감
수많은 품종이 존재하는 외국 식재료 시장과 달리, 국내 시장은 셰프의 선택지가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성시우 셰프는 수입 식재료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잎채소나 구근류만큼은 철저히 국내산을 쓰기 위해 전국 각지의 농부들을 찾아 고군분투해 왔다. 이러한 과정 끝에 결국 강화도에서 소규모 농장을 운영 중인 여성 농부를 만나게 됐고, 4년째 끈끈하게 호흡을 맞추며 한 해의 재배 계획과 작물 양을 미리 조율해 나가는 등 공동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외국인에게는 낯설고 새로운 경험, 한국인에게는 새롭게 재조립된 익숙함. 서구식 코스 흐름 안에서 장의 여운과 발효의 뼈대를 은은하게 녹여내는 것. 바로 이것이 레귬이 써 내려가는 한국적 채식의 언어다.
레귬의 코스 안에서 특히 눈에 띄는 건 ‘포만감’이다. 단순히 양을 늘리는 접근에서 벗어나 리드미컬한 코스 흐름 가운데 곡물과 콩류를 적절하게 흩트려 배치한다. 즉 식사가 끝날 때쯤 기분 좋은 포만감이 차오르도록 탄수화물을 영리하게 배분한 것이다. 그래서 레귬에서의 식사는 가볍게 시작해 묵직한 만족감으로 막을 내린다.
이는 아뮤즈부쉬에서부터 명확히 시작된다. 주방의 자투리 채소 반죽으로 구운 쿠키 사이를 눅진한 장단콩 후무스로 채우고 참깨 강정과 허브로 마무리한 ‘장단콩 후무스를 채운 채소 쿠키 샌드’는, 버려질 뻔한 것들이 얼마나 우아하게 식탁의 중심으로 귀환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4년째 합을 맞춰 온 강화도 농부와의 공동 작업을 통해 레귬의 계절은 땅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어 붉게 물든 제철 설향 딸기 주변으로 유기농 허브와 샐러드 채소가 엉켜 있고, 이 위로 비건 크림치즈와 블랙 올리브 타페나데(Tapenade, 올리브를 주재료로 만든 페이스트)가 덮이는 ‘설향 딸기 샐러드’는 과일의 향기와 지방의 풍미가 완벽하게 교차한다.
정원을 담아낸 듯 싱그러운 과일과 채소 향기, 입안 가득 담기는 지방의 풍미가 완벽하게 교차하는 ‘설향 딸기 샐러드’
또한 토마토와 순무, 적근대잎, 냉이가 잘 우러난 ‘채소 수프’는 화려한 테크닉 대신 수분과 향을 절제해 계절의 정수를 혀끝에 남긴다.
레귬의 코스는 곡물과 콩류를 적절히 배치해, 식사가 끝날 즈음 묵직한 만족감이 자연스럽게 차오르도록 설계한다.
끝으로 대미를 장식하는 ‘트러플과 헤이즐넛 소르베’는 헤이즐넛만으로 뽑아낸 크리미함과 관능적인 트러플 향이 어우러져, 우유와 버터 없이도 리치한 풍미를 오감 가득 향유할 수 있다.
레귬은 ‘비건’이란 정체성을 넘어, 누구나 미식의 즐거움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곳을 지향한다.
비건의 프레임과 별의 무게를 넘어
성시우 셰프는 레귬 오픈 초기 ‘비건’ 대신 ‘100% 플랜트 베이스’란 슬로건을 선호했다. 특정 식이 정체성을 내세우거나 강요하기보단 누구나 편안하면서도 온전하게 미식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현재 레귬은 엄격한 채식주의자부터 식이 제약을 지닌 이들, 다채로운 미식을 즐기는 관광객까지 품어내고 있으며, ‘완벽하게 새로운 채소 요리 경험’이란 찬사와 함께 한국 다이닝 씬의 지평을 넓혀 가고 있다.
성시우 셰프는 레귬을 채소가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서 서사를 이끄는 공간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그는 작년에 첫 1스타를 수상하며 무게감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꼈다고 했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미쉐린은 명예로운 훈장이지만, 요리사가 이르러야 할 최종 목적지는 결코 별이 아니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곤 그는 스스로 “본질을 잊으면 안 된다. 식당의 존재 이유는 결국 요리와 서비스를 매개체로 고객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수없이 되뇌었다고 했다.
이러한 그의 다짐 때문인지 레귬에서 요리를 음미하면 할수록 결국 식탁 위엔 조용하지만 강렬한 한 장면이 각인된다. 늘 곁에서 자리를 지키던 채소가 무대의 한가운데로 걸어 나와 자신의 목소리로 서사를 읊어내는 순간. 더욱이 레귬은 이를 손님에게 소리 높여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정성껏 우린 수분 한 모금, 정교하게 직조된 식감, 철저하게 계산된 리듬을 통해 손님의 미각을 부드럽고도 단호하게 리드해간다.
레스토랑에 들어서면서부터 마주하는 레귬의 로고는 나무 형상을 본뜬 것으로, 레귬의 첫 글자 ‘L’이 뿌리 역할을 하며, 이곳에서 채식에 대한 모든 것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길 바라는 성시우 셰프의 의지를 담아냈다.
레귬에서 채소는 완전히 다른 문법과 눈부신 잠재력을 품은 독자적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성시우 셰프의 식탁에서 채소는 더 이상 무언가를 보조하거나 거들지 않는다. 씨앗이 땅에 닿는 순간부터 디시가 비워지는 찰나까지,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성시우 셰프가 공들여 써 내려가는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지금 이 순간 서울 파인 다이닝 씬에서 또 다른 세계관으로 뿌리 내리고 있다.